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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여행] 싫은 사람과 여행을 한다는 것은

박근하 기자 | 2010/05/14 00:46

[남미여행] 싫은 사람과 여행을 한다는 것은
-SPn 서울포스트, 박근하 기자


안데스의 중턱에서.. 버스는 당나귀

“니콜라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길을 가는 게 좋겠다. 다시 만나더라도 아는 척 하지 말자고!”
나는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존 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배안에서 만난 우리들은 정말 다른 성격의 여행자였다. 처음부터 두 사람뿐이었다면 전혀 친해질 필요가 없었을 텐데, 처음에는 여덟명의 여행자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의기투합했었다.
하지만 단 둘이 남은 지금, 페루 여행지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니콜라스는 두 달 가까이 나를 쫓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잖아도 화난 표정을 가지고 있는 니콜라스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휙 돌아서서 가는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왔지만 그 역시 화가 나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안데스 마을과 마을사이

도대체 얘는 왜 나랑 다니려하는 걸까.
여행지에서 만난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 모토였지만, 역시 배낭족에게 있어서 돈 문제는 민감한 사항일 수 밖에 없었다.
음식점에 가더라도, 슈퍼에서 껌 한개를 사더라도 자기것은 자기가 내는 것이 배낭족의 문화.. 하지만 니콜라스는 오랫동안 일을 하다 휴가를 나온 관광객에 가까웠다. 날마다 비싼 맥주를 서너개씩 사서 마셨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맥주를 권하고 다음번에는 내가 맥주를 사주기를 기대했다. 그저께 내가 30레알 (우리돈 2000원)을 계산하고 어제 그가 20레알을 계산했으면, 오늘도 그가 계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오늘 다시 나보고 40레알을 계산하라고 말하고 다음날 태연히 10레알을 계산하는 그의 뻔뻔함에 완전 질려 있었다.

니콜라스를 만나면서 나의 여행경비 지출은 이미 두배를 넘어가고 있었다. 니콜라스 또한 나름대로 눈치 있게 행동한다고 숙소와 식사에 대한 결정을 모두 내게 맡기고 중간에서 통역해 줄 뿐이었지만 덕분에 내 스페인어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고 히치하이킹은 세 배 이상 어려워졌으며 니콜라스와 함께 있는 한 어느 현지인도 나를 개인적으로 초대하거나 친구가 되어주지도 않았다.

여행자들이 함께 있으면 현지인들과 어울리기도 힘들고, 이것저것 바가지만 쓰게 된다고 말해볼까 했지만, 웬지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는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나에게 니콜라스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정말 어이가 없군, 겨우 5솔(우리돈 2000원)을 절약하자고 두 시간을 히치하이킹한단 말이야.”
‘너 없으면 20분이면 히치하이킹 하는 거 알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보나마나 ‘암컷’이라고 빈정댈게 뻔해서 관두기로 했다. 도대체 나는 왜 니콜라스 몫까지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는 거지?

사실 나는 니콜라스가 싫었다. 197cm가 넘는 키에 70kg의 체중, 어깨와 목은 심하고 굽어 있었고, 생긴 것은 만화 ‘엔젤 전설’에 나오는 나일등을 닮았으며, 아마존 강 그물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자는 모습에 소스라친 적은 몇 번이며, 코는 또 얼마나 심하게 구는지.. 예전에 한 달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피임한다고 자기를 속이고 쌍둥이를 낳았는데, 아이 하나는 저능아였다고 심하게 불평하는 니콜라스. 하지만 내가 봤을때는 니콜라스도 지능지수가 좀 낮아 보였다. 어쨌든 그가 사주겠다는 맥주를 거절한 나에게 결국 그는 화를 내고 말았다.

길에서 만나는 친구들

“돈! 돈! 돈! 네 머릿속에는 온통 돈 생각뿐이구나! 너 사람들 만나면 돈 얘기 밖에 안하는 거 알아? 처음 만난 사이에 왜 프랑스 사회보험 시스템이 궁금하고, 국가별 영국워킹비자 조건이 궁금하고, 페루의 집값과 월급이 궁금한 거지? 넌 라틴 음악이나 동물, 유럽 커피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알아? 돈이 부족하면 몇 달만 여행하면 되잖아! 몇 달을 여행하든, 몇 년을 여행하든 어차피 남미 모든 곳을 여행할 수도 없다고! 달랑 5솔 절약하고자 페루 인들과 싸우면서 굶고 다니는 너를 보면 정말 내가 창피하다! 내가 너를 왜 따라다니는지 모르겠다!”
“아하! 따라와 달라고 말한 적 없어!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가는 게 좋겠다.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말자구!”

휙 뒤돌아 걸으면서 내심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밤 가계부를 쓰면서 그동안 내가 니콜라스보다 훨씬 많이 지출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니콜라스를 무시하고 다녔건만 지출의 20%가 결국 커피와 케잌, 맥주 값이었다는 것. 그리고 혼자서 히치하이킹을 했었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운전기사가 궁것질거리를 사주거나 집으로 초대해 주었지만, 니콜라스라를 끼어 히치하이킹을 할 때면 오히려 트럭 운전사에게 담배를 선물하거나 점심을 사줘야했다는 것, (때론 운전사가 약간의 돈을 요구하기도 했었는데 혼자서 히치하이킹을 할 때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심지어 페루인들 앞에서 자신의 월급을 자랑하는 니콜라스 때문에 결국 운전사와 차비문제로 심하게 다툰 적도 몇 번 있지 않았었던가.!

결정적으로 스페인어가 문제였다. 혼자라면 가는 길 내내 운전사와 수다 떨면서 스페인어를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텐
데, 스페인어를 잘하는 니콜라스가 끼어 있으니 말 그대로 나는 그냥 차에 탑승만 했던 것이다.
니콜라스를 떼어내기 위해 말없이 떠난 적도 있었지만 안데스 산맥에 마을들의 위치란 뻔한 것이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한 우린 결국 어디선가는 재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니콜라스를 만나면서 돈 손해, 시간 손해, 여행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니콜라스는 니콜라스대로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마을을 이동할 때마다 반나절 이상 히치하이킹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완전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럼 넌 버스타고 가라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히치하이킹도 완전 내가 전담하고 있건만. 따라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화를 내도 친구 사이에 홧김에 하는 소리라고만 믿고 있는 이 녀석.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녀석의 포주 기질이었다. 암컷이라는 이유로 히치하이킹이 가능했다고 믿는 니콜라스는 운전사라 내게 관심이라도 있어 보이면, 혹시라도 둘 사이를 오해 받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나를 일부로 운전사 옆자리에 앉히는 센스까지 발휘하지 않았었던가. 함께 다니면서 느꼈던 니콜라스의 지적 능력을 보았을 때 그의 삶의 질 수준은 프랑스에서 평균 아래일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하지도 않는 맥주 한잔을 계산하고 생색내는 이 녀석은 내게 있어 악몽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외치고서 혼자서 씩씩거리며 뒤돌아 걸어 나갔다.

니콜라스와 헤어져서 여행하고 싶다는 것.. 이것은 내 본심이었다.
웬수같은 니콜라스.. 웬수같은 니콜라스.. 프랑스.. 니콜라스..
프랑스.. 니콜라스 프랑스.. 프랑스.. 프랑스..

나는 문득 미국에서 만났던, 날마다 비싼 햄버거를 사먹었던 프랑스 아가씨가 떠올랐다. 그녀는 다 먹지도 못할 햄버거를 자주 사먹을 정도로 가격이 싼 미국 물가는 그녀에게 찬스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비슷한 이유로, 니콜라스에게 있어서 페루의 물가는 거리낌 없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인생의 찬스였을 것이다. 커피든 케익이든 프랑스보다 품질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면서도 얼마든지 거만할 수 있는.
그리고 학교 방학 때마다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면서도 지독한 짠순이로만 구는 내가 프랑스 문화로 비춰봤을 때 알짜 부자로 보여졌을거라는 것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살인적인 한화추락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페루 물가는 한국 물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장기 여행자에게 있어서 유럽인의 일상생활은 (커피, 세탁소, 옷 수선 등등)은 사치였을 뿐이였는데도 말이다.
한 달 후에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는 아마도 이곳에서 여행 추억을 만들고, 원 없이 돈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가방을 들고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서도 멀리 떨어져 따라오고 있는 니콜라스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어쨌든 나는 니콜라스를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손해가 나더라도 나를 쫒아오고 있는 저 녀석을 내가 먼저 내치지는 말아야지. 한 달 전 안데스의 마을에서 내가 이틀을 아팠을 때 먼저 떠나지 않고 밤새 걱정하고 간호를 해 주었던 니콜라스였다.
그때는 정말 니콜라스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었다. 안데스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정신 차리기는 했지만.

나는 씩씩거리면서도 스스로를 타일렀다.
세속적인 성격의 내가 여행지에서 얻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과도 함께하려는 마음일 것이라고 말이다.

해발고도 3250m의 마을 코찬
야마 털깍기

(박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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