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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신작소설 <로라>

탐미적 관능주의에 열광하는 소설가 마광수의 에로틱 노블
편집부 기자 | 2006/01/02 20:15

독특한 미학을 표현해 냄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각광 받고 있는 마광수 교수

지은이 : 마광수 馬光洙
1951년에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소설·수필 등 문학 및 그림으로 시대를 앞서간 독특한 미학을 표현해 냄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각광받았다. 또한 28세 홍익대 전임강사, 33세 연세대 조교수, 4년 후 부교수로 자리 잡아 열정적인 강의와 재치 넘치는 언변으로 학생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92년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학교에서도 해직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6년 후 사면 복권되었으며, 현재 연세대에 재직 중이다.

본문중에서

내가 보기에 삶이란 그저 ‘우연히 내던져진 것’이다. 로라도 역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로라는 운이 좋았다. ‘내던져진 인생’치고는 얼굴이 썩 괜찮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로라의 본명은 김순희였다. 너무나 촌스러운 이름이다(얼굴이 예쁜 여자들은 대개 이름이 촌스럽다). 그런데 그녀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입상하고 난 뒤, 어느 3류 영화감독이 그녀를 스카우트해 배우로 기용할 때 예명을 ‘오로라’로 지어주었다. ‘오로라’는 발음도 괜찮지만 북극의 ‘극광(極光)’을 뜻하고 있어 좋았다. 이름이 뜻하는 대로 배우로서의 찬란한 출세가 보장돼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영화에서 여지없이 실패했다. 워낙 완성도가 낮은 성애영화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번 붙은 예명이 지금은 그녀의 본명처럼 통하고 있었다. 영화는 엉터리였지만 워낙 그녀의 인상이 강해서였다.
― <1 로라> 중에서

사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은 변태성욕이라기보다는 대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약육강식으로 점철되는 이 야(野)한 자연세계에서 모든 식물이나 동물은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로 변신해 가면서 스스로의 실존을 영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마조히스트도 있을 수 없고 순수한 사디스트도 있을 수 없다. 광신적 종교에 헌신하는 이들은 순수한 정신적 마조히스트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타 종교에 대한 적개심에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순수한 사디즘 역시 마찬가지다. ‘군사문화’는 사디즘에 속하는 것이지만,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이들일수록 상부 권력에 대한 굴종이나 복종에서 마조히즘적 쾌감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 <4 엿보이는 것은 아름답다> 중에서

“로라가 자네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던가?”
이왕이면 더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내가 한그루에게 물었다. 로라가 내 아파트로 찾아와 살을 섞을 때, 내게 확인하듯 몇 번이고 물어본 말이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말이었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진 않았어. 다만 ‘정말로 절 사랑하세요?’라고만 말하더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그루가 한 대답이었다.
“이 화백, 자네한텐 어땠지?”
내가 다시 이길로에게 물어보았다.
“난 로라와 자본 적이 꽤 오래돼서 생각이 잘 안 나네만, 아마 내게도 그렇게 물어보기만 했던 것 같네.”
하고 이길로가 대답했다.
“‘사랑해요’라고 강하게 소리치진 않던가?”
내가 다시 이길로에게 물었다.
“글쎄……. 자세히 기억이 안 나는걸. 로라와 잘 땐 워낙 흥분하게 되기 때문에, 그녀가 얘기하는 내용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
― <7 흐름 속에서> 중에서

지금 이 여자는 진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토록 간단하게 ‘행복’이나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 그녀는 대체 앞으로의 긴긴 날들을 어떤 모양새로 살아나가게 될까……. 만약 아주 늙어버린 후엔…`…. 그리고 돈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게 되는 경우라면…….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며 명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전 지금 당신을 사랑해요.”
다시 명희가 말했다. ‘선생님’이란 칭호가 ‘당신’으로 바뀌어 있어 나이 차이에 의한 거리감이 한결 좁혀져가는 것을 느꼈다.
“명희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한참 만에 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지금 이 상태의 감정이 중요하지요.”
명희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매우 상관이 있지. 사랑이란 것이 현실적으로 있다면……. 그건 곧 정(情)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 정이 들려면 함께 지내며 오랫동안 같이 늙어가야만 하거든.”
― <9 예뻐서 우울한> 중에서

명희가 두 손을 내밀어 내 목을 얼싸안아왔다. 그러고는 세차게 내 입술에 입맞추었다. 그것은 신경질적인 입맞춤 같기도 하고 허탈한 입맞춤 같기도 했다. 나는 내 몸이 진공상태가 되어 허공 중에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그녀와 오랫동안 키스했다.
로라와 키스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채나와 키스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꿈속에서 어느 이름 모를 여인과 키스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잠시 후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밧방울들이 너무 거세게 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명희는 갑자기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제발 창문을 그대로 열어두세요. 부탁이에요!”
그래서 나는 창문을 닫지 않고 연 채로 그냥 두었다. 방 안으로 밀어닥치는 비바람 때문에 마치 황야 한가운데서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외롭게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센티멘털한 느낌이기도 하고 사치스런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명희 역시 로라처럼 ‘사치스런 여자’에 속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언니에게 돈을 받아쓰며 열등감을 느끼든 안 느끼든, 그리고 그녀가 로라만큼 완벽한 외모를 가졌든 안 가졌든, 어쨌든 그녀는 소박하고 가난한 여자가 아니라 허영 끼 어리고 사치스러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는 천민(千民), 즉 천민(賤民)이 되기도 하는 내 이름이나 본성과는 절대로 잘 안 어울렸다.
― <11 다시 비> 중에서

“당신은 오늘 비관적인 말씀만 하시는군요. 탐미주의자답지 않아요.”
“나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삶에 지쳐버렸다고나 할까.”
“삶에 지쳐버린 사람이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고 전시회를 열 수 있었겠어요. 여보, 제발 엄살 고만 떨고 빨리 예전처럼 제 긴 손톱이나 만져주세요.”
하긴 로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내가 지금 공연히 ‘사치스런 엄살’을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살할 용기도 없으면서 ‘실존의 허무와 불안’ 따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로 여겨졌다.
― <13 그저 그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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