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문화·예술

전설의 무희 崔承姬

최승희가 무용으로 세계적 인물이 되었지 정치가로서
편집부 기자 | 2006/01/08 00:29

" 반도의 무희,동양의 진주,
일제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세계무대를 활약하며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면서도 세련되고 현대적인 작품으로 명성을 날린 최승희는 일제시대 마라톤의 영웅이었던 손기정과 더불어 민족의 우상으로 평가되었으며, 아시아 지역뿐 만 아니라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전설적인 무용가였다.

일제시대 일본 근대무용의 개척자인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를 통해 서구춤을, 한국전통무용을 집대성했던 한성준(韓成俊/1874-1942)을 통해 전통 춤을 사사하여 서양춤 양식을 체화하여 우리 춤으로 변용, '신무용'(新舞踊)이라는 한국 근대춤의 큰 지류를 구축했던 최승희는 30년대 조선고전무용의 현대화를 주창함과 동시에 미국,유럽,중남미 순회공연을 통해 '반도의 무희','동양의 진주', 1백년에 나올까 말까하는 무용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적인 위상을 구축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운동을 정립했던 진보적 문학가였던 남편 안필승을 따라 46년 월북하여 60년대 말 숙청 당하기까지 민족무용극을 창조하면서 우리 전통춤에 대한 유형별 고찰과 더불어 춤사위의 다채로움을 추출하는 이론적인 업적을 쌓는 등 북한 무용의 토대를 정립했던 것은 물론이고 중국전통 무용의 정리와 체계화를 통해 중국 신무용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으로 중국 무용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무용사에 있어서의 그녀의 업적과 명성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월북 예술가란 이유로, 북한에서는 반혁명자란 이유로 최근까지 베일에 쌓여있었으며, 이로인해 30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냈던 그녀의 작품들과 자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월북예술인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이후에서야 새롭게 조명 되기 시작했다.

'89년 월간 <객석>에서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특집기사 이후, 92년 손인영에 의해 최승희의 무용동작기본이 시연되었고, 95년 정병호에 의한 평전간행, 97년 서울예술단과 최승희의 제자 김백봉에 의한 작품재현공연, 98년 조총련계 무용수 백향주 춤공연과 99년 이후 최승희에 대한 다양한 자료전과 논문들을 통해 그녀의 드라마틱한 일생과 더불어 최승희에 대한 무용사적인 업적 재평가와 이에 따른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과 광주비엔날레에서의 대규모 자료전시회 등을 통해서도 앞으로도 최승희에 대한 조명은 지속될 예정이다.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라 불리웠던 세계적인 무희 - 최승희 -
1911년 11월 24일에 경성에서 아버지 최준현씨와 어머니 박성녀씨(박용경이라고도 함)사이의 사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최승희는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아 성적이 우수하여 소학교를 사년 만에 졸업하고 숙명여자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의 경제사정이 나빴으나 성적이 우수하여 사년동안 장학금을 받았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음악학교와 경성 사범학교의 진학을 희망했으나 연령 미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성에서 일본무용가 이시이 바꾸의 공연을 관람하고 동경에 가서 무용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동경에서 열린 이시이 바꾸 공연에 처음으로 출연하면서 이시이 바꾸 무용단원이 되었고 일본 여러 지역의 공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무용단을 탈단하고 열 아홉 살이던 1929년에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무용<영산춤>을 처음으로 공연했다.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학가인 안필승(안막)과 혼인하였고 1933년 이시이 바꾸무용연구소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제자 김민자와 함께 동경으로 떠났다. 여류무용대회에 출연해 <에헤라노아라>를 추어 무서운 신인 무용가가 나왔다는 호평을 받았다.이후 음악영화<백만인의 합창>과 무용영화<반도의 무희>등으로 활동을 하다 이시이 바꾸에게서 독립하고 첫 일본 소재의 작품 <달밤의 곡>을 발표했다. 1937년에 최승희는 미국으로 떠났는데 뉴욕공연장 앞에서 반일시위를 하는 교포들이 최승희를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 유럽전역과 중남미 순회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세계적 무희로서 동경 가부끼좌에서 공연했으며,동경제국극장에서 세계 기록인 이십사회의 장기독무 공연을 해냈다. 중국으로 건너가 '최청씨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북경에서 대공연을 했다. 일본 군인들의 사기를 돋우는 정책적인 예술을 강요로 견딜 수가 없어진 최승희,안막 부부가 중국 도피계획을 세웠고 곧 안막,최승희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인천을 거쳐서 월북했다. 북한에서 공연을 하면서 무용극<춘양전>,<반야월성곡>을 발표했다.

평양의 국립 최승희 무용 연구소에서 중국 경극 무용의 기본 동작과 중국 고전 무용의 체계화에 몰두했다. 딸 안성희와 함께 모스크바 와구단고프 극장에서 "조선의 밤"에 같이 출연했고, 성희는 공훈배우가 되었다.1955년에는 최승희 무용 생활 삼십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최승희 무용 미술 전람회가 개최되었다.다음해 <조선 민족 무용 기본>이라는 책과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을 발간했다.1958년에 안막이 반당 종파분지의 혐의를 받아서 만일과 함께 체포되었다.남편의 숙청으로 무용활동이 중단되고 연금 상태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문예총 중앙위원,조소 친선 협회 중앙위원,조국 통일 중앙위원에서 실권 없는 요직을 가지고 있었고 무용계에서는 제거된 처지였다. 이 무렵<조선아동무용기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북한정부와 계속적인 마찰이 있던 때에 1967년 최승희가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한국의 북한 문제 연구소에서 나왔고, 일본 아사히 신문에 "최승희등 반 김일성파 추방"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베네수엘라 시인 아리 라메다가 폭로한 글에서도 최승희의 숙청사실이 확인되었다. 최승희의 그후의 모습은 여러가지 소문만 무성한 채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

이와나미홀 창립(1968,일본)과 더불어 총지배인으로 취임하여 지금까지 일본영화예술발전의 산실로서 활약해온 다카노 에츠코(1929~)는 동경국제영화제 제너럴 프로듀서를 비롯하여, 국립필름센터 초대명예회장('97) 등을 엮임하며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폴란드 공로훈장 등 국제적인 영화인으로서 활동해왔다.

일본에서의 유년시절 최승희 공연을 통해 받았던 강렬한 인상과 한국 중견 창작무용 안무가인 김매자의 일본공연을 보고서 한국무용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탐구열정을 갖게 되고, 이에 최승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또한 70세의 나이로 김매자로부터 한국춤을 배워, 이번 호암아트홀 첫날 다큐멘터리 상영(7일 7시)에 앞서 한국의 전통춤인 <살풀이춤>을 한국 관객들 앞에 특별공연으로 선보인다.

- 후지와라 도모코(藤原智子) -

동경대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후 기록영화에 입문하게 된 후지와라 토모코(1932~)는 60년 장편영화<오랑우탄의 지혜>로 감독데뷔 후 미술영화를 비롯한 90편이 넘는 단편을 발표했다. 80년 이후, 노우,가부키,분라쿠 등의 단편을 감독하고, <삼목아이들의 50년>('95)로 문부대사상,에술제작품상 등을 <루이즈, 그 여행길>로 문화청 우수작품상,마이니찌영화 콩쿨기록문화영화상,후지모또상,야마모또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으며, 이번 <전설의 무희 최승희-김매자가 찾아가는 민족의 혼>감독하여, 동경영화제에 출품했으며, 현재 신작을 준비 중에 있다. 이번 한국상영을 위해 다까노 에츠코와 함께 방한한다.

- 김매자 -

1930~60년대 신무용에 이어 70년대 이후 파격적인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한국 창작춤의 모태가 되었던 김매자(창무예술원 이사장)은 동양사상의 예술적 구현과 한국적인 춤 언어의 개발을 모토로 1976년 한국의 최초 한국 창작춤 동인단체 <창무회>를 창단하고, 꾸준한 실험정신으로 한국 창작춤의 표현영역의 확대를 통해 한국창작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성과 대안을 제시하며 한국창작춤의 근간을 이루어 내오고 있다.

<춤본><꽃신>등 한국 창작춤의 교본이 되다시피 한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88올림픽 폐막식 <떠나가는 배> 안무, <리용댄스비엔날레> 초청 공연들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무대에서 한국 춤을 세계에 알려왔으며, 공연과 더불어 각국은 물론 해외 대학 등지에서 한국 춤 반을 개설하여 한국춤을 전파하는 자리도 마련해 왔다.

일본식 신무용 답습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신무용과 민족무용극을 발전시켜 세계에 떨쳤던 최승희의 발자취를 따라 그녀의 정신과 무용세계를 담아보고자 다큐멘터리에서 최승희의 삶의 궤적을 알아본다.

연보

1911년 11월 24일에 경성에서 아버지 최준현씨와 어머니 박성녀씨( 박용경이라고도 함)사이의 사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큰오빠는 승일, 작은오빠는 승오, 언니는 영희이다. 아버지는 가무를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 강점 뒤에 진행시킨 토지 조사사업에 따라 경성근교에 소유한 전답을 빼앗기고 가세가 몰락하자 아버지는 포목상을 하기도 하고 서당 선생 노릇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때부터 머리가 좋아 성적이 우수하여 소학교를 사년 만에 졸업했다. 숙명여자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집안의 경제사정이 나빴으나 성적이 우수하여 사년동안 장학금을 받았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음악학교와 경성 사범학교의 진학을 희망했으나 연령 미달로 뜻을 이루지못했다. 경성에서 일본무용가 이시이 바꾸의 공연을 관람하고 그계기로 동경에 가서 무용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동경에서 열린 이시이 바꾸공연에 처음으로 출연하면서 그의 무용단에 들면서 일본의 여러지역의 공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마후에 무용단을 탈단하고 열아홉살이던 1929년에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무용<영산춤>을 처음으로 공연했다.

3회까지의 신작무용발표회를 한 최승희는 후원지의 유혹, 스캔들소문에 시달렸다. 곧 박영희의 중매로 안필승(안막)과 1931년 혼인을 했다.1933년 딸승자가 태어났고 그해 이시이 바꾸무용연구소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제자 김민자와 함께 동경으로 떠났다. 여류무용대회에 출연해 <에헤라노아라>를 추어 무서운 신인 무용가가 나왔다는 호평을 나왔다.음악영화<백만인의 합창>과 무용영화<반도의 무희>등으로 활동을 하다 이시이 바꾸에게서 독립하고 첫일본소재이 작품 <달밤의곡>을 발표했다. 1937년에 최승희는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공연장앞에서 반일시위를 하는 교포들이 최승희를 규탄하는 시위가 있었다. 유럽전역과 중남미 순회 공연을 마쳤다

세계적 무희로서 동경 가부끼좌에서 공연했다.동경제국극장에서 세계 기록인 이십사회의 장기독무 공연을 해냈다. 중국으로 건너가 '최청씨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북경에서 대공연을 했다. 일본군인들의 사기를 돋우는 정책적인 예술을 강요로 견딜수가 없어진 최승희,안막 부부가 중국 도피계획을 세웠다.1946년에 아들병건이 태어났다. 곧 안막,최승희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인천을 거쳐서 월북했다. 북한에서 공연을 하면서 무용극<춘양전>,<반야월성곡>을 발표했다. 6월25일 북위38도 경계선에서 전쟁이 났다. 딸 승희(성자에서 이름을 바꿈)가 남한에서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식이 보도되었다. 딸 성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라는 독무를 창착했다

세계 청년 축전 예술제에서 최승희의 제자인 중국 조선족 무용단이 금메달을 받고 최승희의 작품<조선의 어머니>가 평화상을 받았다. 평양의 연구소이름을 국립 최승희 무용 연구소로 바꾸고 중국 경극 무용의 기본 동작과 중국 고전 무용의 체계화에 몰두했다. 성희와 함께 모스크바 와구단고프 극장에서 "조선의 밤"에 같이 출연했다. 딸 성희는 공훈배우가 되었다.1955년 최승희 무용 생활 삼십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최승희 무용 미술 전람회가 개최되었다.다음해 <조선 민족 무용 기본>이라는 책과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을 발간했다.1958년에 안막이 반당 종파분지의 혐의를 받아서 만일과 함께 체포되었다.남편의 숙청으로 무용활동이 중단되고 연금 상태가 되었다

문예총 중앙위원,조소 친선 협회 중앙위원,조국 통일 중앙위원에서 실권 없는 요직을 가지고 있었고 무용계에서는 제거된 처지였다. <조선아동무용기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북한정부와 계속적인 마찰이 있던때에 1967년 최승희가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한국의 북한 문제 연구소에서 나왔고, 일본 아사히 신문에 "최승희등 반 김일성파 추방"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베네수엘라 시인 아리 라메다가 폭로한 글에서도 최승희이 숙청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숙청이 온건한것이었느냐 강경한것이었느냐의 해석을 뒤로한채 최승희의 그후의 모습은 여러가지 소문만 무성한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예술 세계

표현 : 마력을 지닌 기교와 표현....

최승희가 세계적 무희가 되고 대중적 인기를 얻은 중요한 요인 하나는 무용연기이다. 곡,한사람으로서 몇천명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신기한 표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승희는 무대에 올라가면 팔짓,어깨짓,허리놀림 들로 넓은 무대 공간을 꽉 차게 했다가 물 흐르듯 흐르기도 하고 물결치듯이 격해지기도 하고 하여 그 한사람의 움직임에 관객들이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그러나 최승희의 무용기법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바깥 형태로 잘 나타나지만 내면적인 섬세한 기법은 홀대되고 춤속에 정서나 모양은 강하게 나타나지만 다양한 선이없었다. 또 우리나라 춤의 춤사위를 그 멋진 표현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의 춤은 몇번이고 똑같은 춤사위로 추는 춤이 아니라 그 주제에 따른 핵심적 주요동작은 있지만 그밖의 춤 동작은 그때그때에 따라 즉흥적으로 달리하여 추어 신선한 느낌을 주었는것이 특징이다.

의상 : 화려하고 관능적인 무용의상

최승희는 현대 무용을 하던 시기에는 몸의 움직임과 모양을 선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단순한 색채와 선이 있는 무용복을 입고 춤을 추었으나, 한국무용으로 전환하면서부터는 한국 민족이 입는 전통 의상을 바탕으로 하되 그 전통성이 시각적으로 더욱 돋보이게 디자인한것을 입었다. 최승희의상의 특징은 불상이나 벽화와 같은 고대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의상과 한국의 민족성이 강하게 풍기는 민속적인 복식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이러한 복식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적용하여 그 인품을 한결 고귀하고 신비스럽게 보이도록 했으며 또 미모와 육체의 선을 살려 화려함과 관능적인 느낌이 일어나도록 했다.

음악 : 반주음악의 까다로운 선택

최승희는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음악적인 무용가라는 평도 듣는다. 무용 창작에서 반주음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반주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엄선하고 우대하여 그이와 함께 생활을 하기가 예사였다.그리고 최승희는 안무를 할때에 반드시 옆에 반주 악사를 두고 했는데 이는 그 춤에 맞는 가락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최승희는 반작곡이나 편곡을 하면서 안무를 하는 수가 많았다. 이러한 안무방법을 쓰기 때문에 최승희의 무용은 음악성이 높은 춤으로 창조되었다. 최승희의 무용 음악의 특징은 민속성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반주 음악에 판소리말고도 민요, 농악과탈춤의 가락 그리고 아악안 삼현육각의 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이 반주 음악은 멜로디 음악보다는 흥겨운 리듬 음악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미학 : 미완성춤의 미학

최승희는 무용안무를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방에서 혼자 했다. 최승희 안무의 특징은 음악에 맞추어 치밀하게 동작을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최승희의 음직임에 반주가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안무는 핵심적 동작만을 창작해 표현적 분위기를 정하는 안무라 할 수 있다. 최승희의 무용이 미완성의 신선한 춤이라는 평은 이러한 안무의 미학에서 나온것이다. 그러나 최승희 무용의 근본적인 형식에는 몇가지 특색이 있다. 이를테면 최승희 무용은 대체로 음악을 시각화한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구상으로 보아서는 음악의 형식을 빌리거나 연극적 형식을 흡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 동-서양을 넘나든 작품들

최승희의 무용작품은 삼백열다섯 종목에 이른다. 최승희의 작품을 분석해보자면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최승희의 작품은 세속적인 주제보다는 역사와 민족을 다루는 내용을 주제로 한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한국춤이거나, 중국춤이거나, 일본춤이거나 춤들이 거개 민족적 배경을 깔고 있었으며 동양 정신을 강하게 풍겼다. 둘째로 최승희는 작품 이름을 조금씩 바꾸면서 무용 구성도 조금씩 달리하여 새로운 작품이 되게 하는 방법올 그이 나름대로 개성이 잇는 프로그램을 형성하였다. 이를테면 <보살춤>으로 살펴보자면 한국에서는 한국 팬들을 위한<보살춤>이 창작되었고, 중국 공연 때에는 중국의<보살춤>이라는 작품이 창착되었다. 이와 같이 <코리안 멜로디>의 작품이 두가지에서 세가지로, <무당춤>이 <쌍부채춤>으로,<검무>가 <쌍검무>로 일본의 <거리의 애인>이 한국의 <유랑 예인패>로, 일본의 <이게니에>가 <희생>을 바뀌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무용 작품은 한 서른한 가지로 추산되는 작품들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 셋째로 최승희의 작품은 시대적 환경과 공연 지역에 따라 거기에 맞는 무용 종목을 형성했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최승희는 한곳에 생활한 것이 아니라 공연 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작품 자체와 흥행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의 재평가
한 인간을 평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평가의 대상은 많은 시간에 걸쳐서 관찰해야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 평가는 윤리와 도덕의 책임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기가 어렵거니와 더군다나 흑백 논리로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는 그녀의 예술을 재조명하여 바르게 기록된 역사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최승희를 정치적으로 평가하느냐,예술가로 평가하느냐의 문제가 확실해야 한다. 최승희가 무용으로 세계적 인물이 되었지 정치가로서 세계적 인물이 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여자를 정치권에 집어넣어서 사상적 압박을 주는 평가를 한다면 그 예술의 본질과 특수성을 침해하게 되므로 이는 근본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를 평가하면서는 이데올로기 요소를 앞세우지 말고 그 예술가 노릇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순 논리의 사고에 빠져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경우에 과거에 한국말고도 일본,중국,북한 해서 네나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친일과,반일,친공과 반공들의 행위가 교차되는 특수 상황에 살아야 했으므로 최승희의 행동을 평가하면서 그 어느 한 행위만을 보고 친일이다,반일이다 하면 모순이 생길 우려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평가에는 이것을 예술을 해 가는 과정에서 생긴 이데올로기 교차로 보고 총체적 평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승희는 우리나라 예술사(무용사)에 기록되어야 할 업적과 공적을 세운사람이다. 일제시대에서부터 해방이 된 뒤로 육십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춤꾼인 광대나 기생들은 사회에 서 천대를 받았기 때무에 그 사람들에게 춤을 배우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그렇기 때문에 한국 무용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때에 무용 연구소를 하고 있던 사람에게서 주로 최승희의 한국춤을, 아니면 이른바 동양 무용과 남방의 무용들을 배웠다. 이중에는 일제 시대의 춤도 있었고, 북한에서 남하한 무용가들이 소개한 북한 창작 춤들도 있었다. 최승희의 근대 한국춤은 일제 시대부터 계속해서 젊은 무용가들에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교육계말고도 국립 무용단이나 직업 무용단 그리고 무용 콩쿨 대회에서 이른바 신한국 무용이라 해서 전파되어 갔던 것의 결과였다. 또 최승희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이로운 공연을 했고 동양 무용을 내세워 서양 무용에 도전한 앞서가는 예술가였다. 최승희가 동양 무용을 내세운 것은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스스로 세계적 무용가가 되고자 하는 욕심과 무관하지 않았겠지만 동양 무용의 세계화를 이슈로 내세운 셈이어서 획기적이 일이었다 할 수 있다.



Copyright ⓒ 서울포스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