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문화광(門化光) 속 '광화문'의 어제와 오늘
-세종대왕 기념관까지②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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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 기념관 ⓒ20110524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작년에 찾은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느낀 것은 재위시 발명된 물품보다도 거대한 문무석과 '성왕'이라는 호칭이었다. 올해도 옥외전시물 때문에 갔다.
여기 전시물들은 내곡동 구 영릉(英陵) 봉분 터 주위에서 나온 석물로 세종 28년(1446)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여 산릉(山陵)을 만들 때 15,000여 명을 동원하여 석실(石室) 등을 만들고 이를 세운 것이다.
돌은 강화산(江華産)이라 하며, 예종 원년(1469)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안할 때 천장 도감(遷葬都監)에서 석물을 옮기기로 하였으나 왕명에 의해 그 자리에 묻었던 것을 1973년 12월~1974년 3월에 걸쳐 발굴하여 같은 해 5월에 이곳으로 옮겼다.
높이 설치된 대리석의 '세종성왕기념탑'은 우리나라 역사상 으뜸가는 위인이요, 드높은 은인으로 모시고자 세운 모양인데, 일부가 자의적으로 '성왕'을 붙여 혼선만 부를 뿐, 역사는 '세종대왕'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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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표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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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관 야외에 전시된 석물과 문무석(文武石). 문무석은 키가 3m쯤 된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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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 기념탑. 세종성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울포스트 |
세종대왕 신도비(世宗大王 神道碑)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
시 대 : 문종 2년(1452)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번지 157호
세종대왕 신도비 는 문종 2년(1452)에 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 영릉(英陵)에 세워졌던 것을 1974년 5월에 이전해 온 것이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으로 예종 원년(1469) 3월에 현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기면서 신도비와 영릉 주변의 석물(石物)을 그대로 두었다. 신도비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나 종2품 이상의 고위관리만 무덤 앞에 세울 수 있었다.
이 신도비는 옛 영릉 터에서 약 1km 떨어진 순조의 인릉(仁陵)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신도비의 머리부분인 이수(螭首)는 두 마리의 용이 좌우에서 구슬을 물고 있는 모습이며, 조각 솜씨는 매우 정교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손상이 심하다. 총 4,886자의 글자가 새겨진 이 비석은 세종대왕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소헌왕후, 후궁 및 그 자녀들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데 글자가 깎여져 나가 읽기가 어렵다. 이 비석의 앞면은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 뒷면은 김조(金銚)가 글을 짓고, 글씨는 안평대군이 썼다.
신도비의 제작은 정분(鄭笨)과 민신(閔伸)의 지도아래 1백 50여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거의 2년 만에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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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 신도비. 높이가 4m쯤(문화재청 불완전한 자료에는 이수포함 비신 5.7m) 된다.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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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처에 있는 영휘원. 고종의 계비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 ⓒ서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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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친왕과 엄귀비 ⓒ자료사진 |
기념관 옆에는 전에 홍릉이라고 불렀던 곳에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검색 등 참고)
영휘원은 조선 26대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능으로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소재. 경내에 함께 있는 엄귀비의 손자 이진(李晉:英親王의 아들 1921∼1923)의 묘인 숭인원(崇仁園)도 사적에 포함된다.
엄귀비는 1854년 증찬정(贈贊政) 엄종삼(嚴鍾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입궐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閔妃)의 시위상궁(엄상궁)이 되었으며, 명성황후가 1896년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뒤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을 모신 후 후궁이 되어 영친왕 이은(英親王:李垠)을 낳았다. 1911년 7월 20일 58세에 죽어,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七宮)에 봉안되고 시신은 이 곳에 묻혔다.
원래 이 곳은 황실의 가족묘지로 정한 곳인데, 명성황후(자는 순종)의 능인 홍릉(洪陵)이 있어 이 일대를 홍릉이라 일컬었으나, 홍릉 자체는 1919년 3월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고종과 합장하기 위해 옮겨졌다.
산책하듯 둘러 본 세종대왕 기념관. 3m쯤 돼 보인 문인석,무인석(文人石,武人石)은 위엄이 넘친다. 보수했다면서 색깔도 다른 코킹이라는 고무본드로 붙여 놓은 것은 문화재를 다루는 사람들의 몰상식. 높이 5m쯤의 세종대왕 신도비도 - 다른 곳의 유물도 대부분 마찬가지인데 - 보호한다는 느낌이 든 것이 아니라 창살에 가둬 놓은 것 같다. 왜 들여다 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놨는지 모를 일이다. (龍)
※ 추기
세종대왕 신도비 : 화강암, (문화재청 불완전한 자료에는) 이수포함 비신 5.7m, 두께 0.50m, 너비(하단1.55m, 상단1m), (아직까지 귀부는 발견하지 못해 자연석으로 대용)
문관석인상1 화강암) 높이 3.15m, 어깨너비1.04m, 두께1.07m
문관석인상2 화강암) 높이 2.84m, 어깨너비1.06m, 두께0.96m
무관석인상1 화강암) 높이 3.12m, 어깨너비1.07m, 두께1m
무관석인상2 화강암) 높이 3.23m, 어깨너비1.06m, 두께1m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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