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조선왕릉의 본산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 ▲ 동구릉(東九陵)은 '9기(基)의 능명'으로, 총 16개 봉분에 17위가 안장돼 있는 곳(9기 능명, 16개 봉분, 17위 안장). 1970년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6월에는 '조선왕릉 40기(능명 기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10926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동구릉(東九陵)은 조선 왕궁의 동쪽(옛 양주군, 현 구리시)에 있는 '9기(基)의 능명'으로, 총 16개 봉분에 17위가 안장돼 있는 곳(9기 능명, 16개 봉분, 17위 안장). 1408년(태종8)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터부터 조선시대 일대를 통해 족분(族墳)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王陵群)이다. 1970년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6월에는 '조선왕릉 40기(능명 기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구릉은 약 60만 여 평의 숲속 능간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특히 입구에는 수 백년 소나무가 명물로 서 있다. 가히 한반도 제일이라해도 과언이 아닐지 싶다.
능이 정해진 것은, 조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 있을 때 양주 팔야리(八夜里) 에서 8일을 묵었다고 해서 왕숙천(王宿川)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말년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정하고 시름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리(忘憂里) 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하는데, 당시 이성계는 도성 한양에서 망우리 고개를 넘어 양주에 오갔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이성계)가 죽은 뒤 태종(이방원)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길지(吉地)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하륜(河崙)이 양주검엄(楊州儉嚴)에 나아가 보고 능지로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구릉 상지전설(相地傳說)은 태조가 생전에 무학(無學)을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족분의 적지를 택정해서 얻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
| ⓒ서울포스트 |
 |
| ▲ 동구릉 앞 소나무의 모양과 건장한 기상이 대단하다. 속리산 정이품송이 사라질 단계라서, 이 소나무가 한국의 명품송 역할을 할 날이 있을 것이다.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여기서 '기록'과 '전설'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이 후손들을 위해 무덤지역을 택정했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다. 태조가 상왕,태상왕으로 있을 때 함흥과 왕숙천,소요산 지역 등에서 소요(逍遙)하면서, 그리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정도로 당대 뛰어난 풍수가인 무학대사(無學大師)와 늘 함께 하면서 자신이 묻힐 자리를 봐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따라서 전설의 '태조가 생전에 무학(無學)을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족분의 적지를 택정해서 얻은 곳'이라는 설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기자 주)
태종(이방원)은 부친을 현 동구릉에 장사하고 계모 신덕왕후릉도 (중구 정동에서) 도성 밖 현 정릉으로 천장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복 동생들을 죽이는 등 계모에 대한 적개심으로 천장한 능의 석물을 광통교 보수에 써 만인이 이를 밟게 했다. 태조도 생전에 아들 태종에 대한 증오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
| ▲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서울포스트 |
조선은 이성계의 신흥사대부 세력이 주축이 되어 낡은 고려를 청산하고 1392년 7월 17일 개국했다. 이날 태조 이성계가 개성(송경 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34대이자 (공식적으로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고려 35대 왕위'에 올랐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제헌국회가 7월12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14일 국회의장 이승만의 서명을 거쳐 7월17일 조선 개국일에 맞춰 공포되면서 제헌절로 되었다.)
이성계는 즉위초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우선, 명나라에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하고,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해, 왕사(王師) 무학(無學: 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도읍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2년 7월 17일 태조부터 1910년 8월 29일 순종황제까지 519년 존속한 조선은, 대한제국이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 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 한일합방늑약韓日合邦勒約,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일본어: 日韓併合条約にっかんへいごうじょうやく. 조약 전문 중: 한국황제폐하韓國皇帝陛下와 일본황제폐하日本國皇帝陛下는 양국간兩國間의 특수特殊하고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를 회고回顧하여 상호행복相互幸福을 증진增進하며 동양東洋의 평화平和를 영구永久히 확보確保코자...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을 함으로써 멸망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조선시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했다. 고종 34년에 임금의 위호(位號)를 황제(皇帝)로 하고 조선을 '대한제국'이라 개칭했다.
한일합방 후 1919년 3월 1일에 대한제국이 독립을 선언,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돌입했다. 1945년 8월 15일 국권이 회복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남쪽 조선만이 대한민국을 건국(초대 대통령 이승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 동구릉(東九陵)이라고 부른 것은 문조(文祖)의 능인 수릉(綏陵)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부르던 사실이 실록에 전하고 있다. 사진은 조선후기 '七陵'으로 표기된 수도권 지리도 ⓒ서울포스트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에는,
건원릉(建元陵)은 조선을 세운 1대 태조(太祖)의 능 - 단릉(單陵),
현릉(顯陵)은 5대 문종(文宗)·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목릉(穆陵)은 14대 선조(宣祖)·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휘릉(徽陵)은 16대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의 능 - 단릉(單陵),
숭릉(崇陵)은 18대 현종(顯宗)·정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능 - 쌍릉(雙陵),
혜릉(惠陵)은 20대 경종(景宗)의 정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 - 단릉(單陵),
원릉(元陵)은 21대 영조(英祖)·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능 - 쌍릉(雙陵),
경릉(景陵)은 24대 헌종(憲宗)·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의 능 - 삼연릉(三連陵),
수릉(綏陵)은 순조(23대)의 세자 문조(文祖)와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능 - 합장릉(合葬陵) 이 있다.
(아래 능의 설명은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
| ▲ 문화재청 홍보자료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 표기된 수자는 능이 조성된 순서 ⓒ서울포스트 |
 |
| ▲ 경내 개천 ⓒ서울포스트 |
1. 건원릉 [健元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번지)
조선 제1대 왕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내에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능인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으나 고려시대 왕릉에는 없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봉분 주위를 두르고 있고,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石馬)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태조는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숨을 거뒀다. 영의정 하륜(河崙) 등이 산릉지(山陵址)를 물색하다가 그해 6월 28일 현 위치로 결정하였고,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군정(軍丁)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9월 7일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발인하였다.
 |
| ▲ 건원릉(建元陵). 조선을 세운 1대 태조(太祖)의 능 - 단릉(單陵) ⓒ서울포스트 |
 |
| ▲ 건원릉의 석물들은 의외로 소박하다. ⓒ서울포스트 |
 |
| ▲ 태조릉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2. 현릉 [顯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번지)
조선 제5대 왕 문종(文宗 1414~1452 재위 1450∼1452)과 문종의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의 무덤.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영릉(英陵,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의 형식을 따른 능으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의 능이 문종,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으로,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았다.
병풍석에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 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도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묘역 가장 아랫단에는 머리·눈·코가 큼직하고,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선 무인석이 있고, 튀어나온 눈과 콧수염 등이 이국적인 문인석이 있다. 문종 이전 왕들의 능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나 문종 때부터는 신도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1441년(세종 23) 문종보다 1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
| ▲ 현릉(顯陵). 5대 문종(文宗)·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서울포스트 |
 |
| ▲ 조선왕릉을 통틀어 이미지를 대표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난 현릉을 꼽는다. ⓒ서울포스트 |
 |
| ▲ 현릉 경내 금강송. 단종복위를 꾸미다 발각돼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러 가던 성삼문의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라는 시가 있다고 한다. ⓒ서울포스트 |
 |
| ▲ 현덕왕후릉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 현릉의 문무석은 10척이 넘고 석물들도 유난히 크고 화려하다. 현덕왕후릉에서 건너 보이는 문종릉 ⓒ서울포스트 |
 |
| ▲ 문종릉에서 내려 보이는 현덕왕후릉 ⓒ서울포스트 |
 |
| ▲ 문종릉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5대 문종의 능. 동구릉에서 공간과 능 규모가 가장 크고 넓으며 경관도 수려해 '조선왕릉'을 대표할만 하다. 문무인석 등의 석물 규모도 최대로, 소박한 건원릉(태조)보다 훨씬 크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이자 단종의 아버지로 1450년 37세에 왕에 올라 재위 3년째인 1452년에 병사했다. 그후 세자 단종(1441~57)이 어린 나이인 12세 1452년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격변 중 하나인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 삼촌인 수양대군(세종의 둘째아들, 세조)에 의해 일어난다. 이 난으로 수양대군은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권을 손에 넣었으며 이에 불복한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무자비하게 처형당하는 등 정치세력간의 갈등은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세조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조카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세조가 아니었더라면 구신(舊臣)들의 세력 다툼에 조선왕조가 멸망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 이에 이씨 왕가의 종친으로서 불가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도 있으나, 최근 제기된 주장은 세조가 문종 죽음에 관여했으며 치밀하게 왕위찬탈을 노려왔다고 한다.
그 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하여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단종)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했다. 집현전(集賢殿) 학사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에게도 좌우협찬(左右協贊)을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그런데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수양대군에게 처참히 제거당하는 것을 필두로 성삼문 등 사육신과 김시습 등 생육신을 만들었다. 이후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되어,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重臣)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이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3. 목릉 [穆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번지)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1555~1600),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1584~1632) 세 사람의 무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왼쪽에 선조, 가운데에 의인왕후, 오른쪽에 인목왕후의 능이 있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아랫부분은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감싸여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 난간석을 비롯하여 혼유석, 망주석 1쌍, 장명등,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문인석·무인석 각 1쌍, 석마(石馬)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릉과 인목왕후릉은 비슷한 형식으로,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과 혼유석·망주석·장명등 등의 석물이 있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의인왕후 박씨의 왕비릉인 유릉(裕陵)이었다. 목릉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태조의 능인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터가 좋지 않고 물이 찬다 하여 1630년(인조 8) 유릉 자리 즉 현 위치로 옮겼고, 이때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불렀다. 1632년 인목대비의 능을 조성하여 세 개의 능을 이루게 되었다.
 |
| ▲ 목릉(穆陵). 14대 선조(宣祖)·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서울포스트 |
 |
| ▲ 인목왕후릉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 의인왕후릉 ⓒ서울포스트 |
 |
| ▲ 선조릉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4. 휘릉 [徽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5-2번지)
조선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1624~1688)의 무덤.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해 12월 16일 능에 안장되었다.
봉분을 둘러싸고 12지신상을 새겨 방위를 표시한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고, 봉분 뒤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봉분 앞 혼유석(魂遊石)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은 5개로, 도깨비가 새겨져 있다. 조선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이후 왕릉부터 4개로 줄었는데 휘릉 때부터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라 5개가 되었다.
봉분 주위의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각각 2쌍으로,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다. 특히 석양은 다리가 너무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봉분 아랫단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높이 2.4m에 이르는 웅장한 석물들로,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마멸되어 윤곽만 남아 있고, 무인석은 목이 없이 얼굴과 가슴이 붙어 있는데 우직하고 우람한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밖에 장명등·망주석·석마(石馬) 등의 석물이 있다.
 |
| ▲ 휘릉(徽陵). 16대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의 능 - 단릉(單陵)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5. 숭릉 [崇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번지)
조선 제18대 왕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과 그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1642~1683)의 무덤. 현종은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18일 34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숨을 거뒀다. 팔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능을 조성하였고, 12월 13일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남서쪽 산줄기에 예장하였다. 명성왕후는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세상을 떠나 현종 옆에 묻혔다.
하나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 안에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으로, 난간석이 두 능을 감싸고 있다. 병풍석은 없으며,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무인석·석마 각 1쌍의 석물을 갖추었다.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 무덤인 장릉(長陵)의 석물에서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
| ▲ 숭릉(崇陵). 18대 현종(顯宗)·정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능 - 쌍릉(雙陵)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6. 혜릉 [惠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0-2번지)
조선 제20대 왕 경종(景宗 재위 1721∼1724)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1686~1718)의 무덤. 동구릉 서쪽 능선의 숭릉(崇陵; 현종의 능)과 경릉(景陵; 헌종의 능) 사이에 있다.
단의왕후는 1718년(숙종 44) 2월 7일 창덕궁 장춘헌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1720년(경종 1) 왕비로 추존되었다. 혜릉은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석물의 크기 또한 다른 왕릉의 것보다 작은데 단의왕후가 죽을 때 세자빈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능도 단출하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봉분을 에워싸고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 주위에 혼유석과 세호(細虎)가 새겨진 망주석 1쌍,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높이 173cm의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며, 장명등은 남아 있지 않다. 그 아랫단에는 높이 183cm의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었다.
 |
| ▲ 혜릉(惠陵). 20대 경종(景宗)의 정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 - 단릉(單陵)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7. 원릉 [元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번지)
조선 제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1745~1805)의 무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있다.
영조는 원비인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弘陵) 자리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정조가 현 위치에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릉이 있는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있었던 곳으로, 영릉은 1673년(현종 14)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영조는 1776년 3월 숨을 거두고, 같은 해 7월 27일 능에 안장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원릉을 조성한 지 29년 후인 1805년(순조 5) 6월 20일 영조 옆에 안장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난간석이 두 왕릉을 에워싸고 있다.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으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1좌씩 놓여 있고, 혼유석 좌우로 받침에 꽃문양을 새긴 망주석 1쌍이 있다. 그밖에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
| ▲ 원릉(元陵). 21대 영조(英祖)·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능 - 쌍릉(雙陵)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원릉에는 다른 능과 달리 3개 표석(비각)이 있다. 하나는 손자 정조가 친필로 '조선국 영종대왕원릉(朝鮮國英宗大王元陵)'이라 쓴 것이고, 하나는 고종이 황제국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선대 시호를 황제로 추존하여 '조선국 영조대왕원릉(朝鮮國英祖大王元陵)'이라 쓴 것이다. 또 하나는 정순왕후의 단독 표석]
8. 경릉 [景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번지)
조선 제24대 왕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과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1828~1843),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1831~1903)의 무덤. 건원릉(健元陵; 태조 무덤) 서쪽에 있다.
경릉이 있는 자리는 원래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이 있었던 곳인데 터가 좋지 않고 물이 찬다 하여 1630년(인조 8) 목릉을 동구릉 내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 하지만 목릉 이장 때 봉분을 열어보니 아무 문제가 없어 1843년(헌종 9) 16세의 나이로 숨진 효현왕후의 능을 이곳에 썼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849년 헌종이 그 옆에 묻혔고, 1904년 효정왕후도 함께 묻혔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놓인 삼연릉(三連陵)으로,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형식이다. 가장 오른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왕후, 왼쪽이 효정왕후의 능인데 이런 배치는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난간석이 세 개의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을 따로따로 놓았다.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인 봉분 주위에 혼유석·망주석·석양(石羊)·석호(石虎)가, 그 아래쪽에 장명등·문인석·무인석·석마(石馬)가 배치되었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이 있다.
 |
| ▲ 경릉(景陵). 24대 헌종(憲宗)·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의 능 - 삼연릉(三連陵)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 경릉 경내 소나무숲 ⓒ서울포스트 |
9. 수릉 [綏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2번지)
조선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의 원자로 왕세자(효명세자)로 책봉되고,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翼宗 1809~1830)과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1808~1890)를 합장한 무덤. 효명세자는 1830년(순조 30)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고, 같은 해 8월 4일 서울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인 의릉(懿陵) 좌측에 무덤을 만들어 연경묘(延慶墓)라 하였다. 1835년(헌종 즉위) 5월 19일 효명세자가 왕(익종)으로 추존되면서 연경묘는 수릉(綏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그 후 풍수상의 문제로 2번에 걸쳐 능을 옮겨 1855년(철종 6)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의 태조 무덤 건원릉 좌측에 자리 잡았다. 신정왕후는 1890년(고종 27) 4월 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숨져 같은 해 8월 30일 익종과 합장되었다.
조선 왕릉은 일반적으로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수릉은 2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이 있는 윗단에는 봉분을 둘러싼 12칸의 난간석과 혼유석 1좌,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망주석 1쌍이 있으며 3면의 나지막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石馬) 각 1쌍, 문인석·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은 길쭉한 얼굴에 눈과 입술이 가늘게 표현되고,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로 조선 후기 인물 조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
| ▲ 수릉(綏陵)은 순조(23대)의 세자 문조(文祖)와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능 - 합장릉(合葬陵)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후 헌종의 아버지인 문조(익종翼宗)를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를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존했다.
문조(文祖, 익종翼宗)는 헌종(憲宗)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정식 시호는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微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101자로 재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조선왕 중 가장 긴 시호다. 세자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도 불린다.
또 신정왕후 정식시호는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정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王后)' 56자로 조선의 왕후 가운데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고종(이개똥,이명복李命福,이재황李載晃, 후에 이희李熙로 개명)이 이처럼 영조와 문조, 신정왕후에 지극인 것은 자신이 왕과 거리가 한참 먼 혈통임에도,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이 영조의 5대 현손이고 이로 인해 신정왕후가 자신을 양자로 삼아 줘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23대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문조는 영의정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신정왕후)을 세자비로 맞는다. 둘 사이에 24대 헌종을 낳았으나 헌종이 후사 없이 대가 끊겨,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들의 주도로 장조(장헌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을 철종으로 옹립했다.
다시 철종이 후사가 없자 그간 안동 김씨에 밀려있던 신정왕후(조대비)는 고종을 즉위하게하여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대원군의 집정을 이루게 한다. 이어 고종을 풍양 조씨와 혼인시킬려고 했지만 대원군이 반대하고 민씨 집안의 볼품없는 자영(명성황후)과 혼인시킨다. 대원군 자신과 아들까지 민씨 집안과 겹혼인을 함으로써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세도는 막았으나 새롭게 여흥 민씨의 외척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으며, 더군다나 며느리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 새끼를 데려다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원군과 고종과 민비의 권력갈등과 주변국들의 내정 간섭으로 조선은 치욕을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 ⓒ서울포스트 |
 |
| ⓒ서울포스트 |
(+키워드: 능,릉,능호,릉호,능명,릉명,능이름,릉이름,능상,릉상,능침,릉침)
후기: 동구릉 관리사무소의 협조로 전 지역을 촬영했으나 조상의 손길이 담긴 세세한 부분까지는 담아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다음 기회로 미루며... (龍)
[부록]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朝鮮王陵)
조선왕릉(朝鮮王陵)은 519년 동안(1392~1910) 지속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무덤으로 능명 기준 총 44기(基)다. 이 가운데 북한 지역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과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 ▲ 하늘에서 본 건원릉 ⓒ자료사진 |
조선왕릉 [朝鮮王陵, 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4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유적으로서 모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519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한 왕조가 지속된 사례도 드문데다가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도 유례가 드물다.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공간으로서 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하다.
왕릉의 입지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 조영술을 따랐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능역은 한양성 서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라고 명시하였는데, 도성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도성을 중심으로 반경 10리(약 4㎞) 밖에서 100리(약 40㎞) 이내가 입지의 첫 번째 기준이었다. 실제로 북한 지역에 있는 제릉(齊陵), 후릉(厚陵)과 경기도 여주의 영릉(英陵·寧陵),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을 제외하면 나머지 왕릉은 모두 서울 사대문으로부터 100리 안에 조성되었다.
능역은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변시설로부터 격리하고, 그 범위도 차츰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步)를 능역으로 하였다가 태종 때 161보로, 현종 때 200보로 늘어났다. 능역의 구조는 각종 제례 절차를 수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진입공간-제례공간-전이공간-능침공간'을 기본 구조로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를 따르고, 뒤의 주산(主山)과 앞의 조산(朝山) 등 두 겹으로 둘러싼 산을 경계로 삼아 넓은 녹지를 조성하였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조선왕릉은:
제1대 왕 태조의 건원릉(健元陵)과 신의왕후의 제릉(齊陵),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顯陵),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과 정순왕후의 사릉(思陵),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光陵),
제8대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昌陵),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宣陵), 공혜왕후의 순릉(順陵),
제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연산군묘(燕山君墓),
제11대 중종의 정릉(靖陵)과 단경왕후의 온릉(溫陵),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문정왕후의 태릉(泰陵),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康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목릉(穆陵),
제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의 광해군묘(光海君墓),
제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장릉(長陵)과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
제19대 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의 명릉(明陵),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제20대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懿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元陵), 정성왕후의 홍릉(弘陵),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健陵),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仁陵),
제24대 헌종과 효헌왕후·효정왕후의 경릉(景陵),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睿陵),
제26대 고종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제27대 순종과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유릉(裕陵),
그리고 추존왕인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敬陵),
원종과 인헌왕후의 장릉(章陵),
진종과 효순왕후의 영릉(永陵),
장조와 헌경왕후의 융릉(隆陵),
익종(문조)과 신정왕후의 수릉(綏陵) 등이 있다.
(출처: 조선왕릉 [朝鮮王陵, 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생몰이 특이한 왕: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 24대 헌종(8세),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 12대 인종(9개월),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 21대 영조(53년), ▷가장 단명한 왕: 6대 단종(17세), ▷가장 장수한 왕: 21대 영조(83세), ▷18대 현종은 청나라에서 태어남]
 |
| ▲ 시대별 조선왕조 ⓒ자료사진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에 대하여 (검색 참고)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1408년(조선 태종 8). 조선 제1대왕. 재위 1392∼1398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영흥) 출생.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였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으며, 같은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 친병(親兵: 私兵)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 제일 먼저 입성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대파,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崔濡)가 원제(元帝)에 의하여 고려왕에 봉하여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명을 인솔, 평안도 지방에 쳐들어오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였다.
이무렵 여진족은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 함주까지 함락시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그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격퇴함으로써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뒤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하였으며,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하였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출진,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하였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였다. 이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곧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무렵 그는 신흥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으며,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하였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 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393년 9월에 착공,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 北門)·흥인문(興仁門: 東大門)·숭례문(崇禮門: 南大門)·돈의문(敦義門: 西大門)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 등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사진·자료수집·정리·편집]=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
NEWStory makes
History -
서울포스트.seoulpost.co.kr]
서울포스트 태그와 함께 상업목적 외에 전재·복사·배포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