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강월헌에 서서 달을 바라본다
-SPn 서울포스트, 나종화 객원기자
 |
| ▲ 여주 신륵사 ⓒ20120110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나종화 |
어머니와 신륵사
어머니는 평생 당신이 태어난 나주 바깥 세상을 여행하지 못했다.
광주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그건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가신 것이 전부다.
여건이 좋았다면 어머니는 여류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않은 평범한 시골 아낙이었지만 초서체 필체로 19세기 말엽 사람들이 사용하는 고어(古語)를 구사하여 시를 쓰시곤 했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셨을 법도 하건만 선천적으로 약한 비위 때문에 차멀미가 너무 심해서 바깥나들이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꼭 가보고 싶어하시던 곳이 여주 신륵사와 세종대왕 영릉이었다.
"막둥이 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꼭 가보고 싶구나.
니 옆자리에 앉으면 멀미 같은거 안헐것 같다."
몇 년만 더 기다려 주셨더라면 세종대왕 영릉과 신륵사도 그리고 낙산사와 경주까지도 모시고 돌아다니면서 다 보여 드렸을 텐데 결국 어머니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신륵사와 영릉을 마음에 품고 가셨다.
지금도서 여주를 지날때면 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런데 가느라 바쁘고 또 오느라 바뻐서 막상 신륵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원주 가는김에 맘먹고 짬을 내었다.
여강(麗江)을 따라가니 신륵사가...
신륵사 매표소에서 입장료 2300원을 지불하고 조금 걷다 보니 남한강 강변이다.
강바람이 왠지 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기저기 4 대강 공사의 잔재들이 눈에 뜨였기 때문일게다.
강변을 걷다보니 강 건너편에 신축중인 호텔과 높다란 타워크레인이 물 그림자를 드리우고 파장이 길어진 오후의 햇살로 금박을 한 물결위로 한무리 물오리떼들이 날아와 앉는 한가로운 풍경이 비로소 마음에 와 닿는다.
여긴 남한강이 아닌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옛 사람들이 남한강중 딱 여기만 잘라서 여강(麗江)이라 불러주었겠는가.
충청도.강원도 일원의 내륙 산물을 실은 돛배들이 한양을 오가고 뱃사공들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을 것을 생각하니 운치있는 그림 한 폭이 떠 오른다.
그 옛날 여강을 상상하면서 기분 좋게 신륵사로 향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
대부분의 명산 대찰들은 모두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가람이 조화롭게 배치 되어 있어 보는이의 감동을 자아내지만 요즘은 절 주변이 온통 공사판이고 절집과는 결코 어울릴성 싶지 않은 국적 불명의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어 저자거리 못지 않게 어수선해진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단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뭔가 가지려는 욕심 그것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초조함 그것을 놓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 에서 벗어나 마음을 환하게 밝히며 평화가 밀려든다.
그래서 마음속에 안개가 자욱해지면 청정한 산사를 찾고 싶은 것이다.
이번에도 잔뜩 물먹은 마음이 어머니께서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신륵사로 발걸음을 이끌었나보다.
뭔가 다른 신륵사...
신륵사도 어김없이 공사중...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절집들은 한 15년 전 부터 내리 공사중이다.
훼손된 문화재 복원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일 것이고 밀려드는 템플스테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건축이 불가피한 측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찰의 청정함을 찾아서 일부러 온 나그네 입장에선 그런 소란에 웬지 모를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그래도 신륵사의 기운 만큼은 뭔가 확실히 달랐다.
나옹선사의 부도탑앞에서 옷깃을 여미다
신륵사 경내에 들어서서 범종각 왼편을 따라 올라가니 절집에서 그리 흔히 볼 수 없는 조사전(祖師展)이 눈길을 끈다.
신륵사 조사전은 고려말 조선초 격변기에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위대한 선각자로서 삼대화상(三大和尙)이라 일컬어지는 지공선사 나옹선사 그리고 무학대사를 모신 곳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나 조선의 수도 한양과 경기도 일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까지 연결되는 당시에는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던 수운(水運)의 요충지 신륵사는 중간 경유지로서 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다갔을 것이고 지공.나옹.무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후대에 조사전을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나옹선사의 경우 말년에 시주하던 양주 회암사를 출발하여 밀양 영주사로 가던 중 여기소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창건하거나 이끌었던 절은 아니었지만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유난히 많다.
조사전과 명부전 뒤편 소나무숲으로 올라가면 석종(石鍾)형태의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 부도탑을 볼 수있는데 나옹선사를 모신 곳이다.
푸른 이끼에 8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돌탑 앞에 서니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석종 앞에 있는 석등의 부조가 정교하고 아름다워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신륵사의 풍수를 보면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비결이...
신륵사를 돌아보면 절터를 잡은이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홍수철이면 범람할 우려가 많은 강 굽이의 비산비야(非山非野)라면 당연히 흉지(凶地)로 여겨졌을 텐데 여기에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숨어있는 이 걸출한 길지(吉地)를 찾아낸 지사(地士)의 비범함이 엿보인다.
그뿐 아니라 구글어스 위성 사진으로 살펴 보면 신륵사의 가람배치가 주변 지세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소 미흡한 부분은 탑과 크고 작은 전각을 두루두루 배치하여 안정되고 견고한 풍수 지리적인 환경을 구성하여 또 한번 감탄하게 한다.
우청룡으로 뻗어내린 암반위에 석탑 대신 흔치 않은 전탑을 세운 것 또한 이러한 풍수적 균형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풍수가들은 우리나라 전통풍수를 폄하해 왔고 나 또한 마찬가지 견해를 갖고 있었다.
당나라때 부터 거듭 발전하여 정교한 고등수학적 이론적 토대를 갖춘 현공풍수의 관점으로 볼땐 우리나라의 전통풍수는 열등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 풍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곳 신륵사의 예만 보더라도 사찰과 지세가 완벽하게 조화되어 자연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생태 환경을 구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전통풍수속에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현대 미학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석굴암을 만든 장본인들에 의해 갈고 다듬어진 풍수이론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풍수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달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는 오늘날의 생태계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단초가 숨겨져 있음을 신륵사의 지령(地靈)이 일러주는 듯 하다.
강을 다스리기 위한 절 신륵사
신의 힘으로 제압한다는 의미의 신륵사라는 이름엔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본질은 신의 힘이라도 빌어 저 강을 다스리고자 했던 발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끔 들르는 이들에게 있어서 신륵사 앞을 흐르는 아름다운 여강은 풍류의 대상일 수 있겠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민중들에게 강은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범람하여 모든 것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공포의 마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어 신의 힘이라도 빌려 다스리고 싶은 염원으로 여기에 신륵사를 세우지 않았을까.
지금은 근대화된 수리 기술이 신륵사를 대신해서 강을 다스리고 있어 범람의 두려움으로 부터 해방되었다.
충주호를 비롯한 상류댐들이 홍수를 막아주고 4대강 사업을 통해 거대한 보를 막아 여강을 아예 얌전한 호수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을 인간의 삶에만 맞추려는 무분별한 개발은 틀림없이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벌써 기후변화를 비롯하여 금세기에 불거지기 시작한 환경문제들이 우리 자신과 후손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저 여강은 도도히 흐르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강물과 공존하는 법을 터득 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치수(治水)철학이다.
1300년전에 창건한 신륵사에 그 비결이 숨겨져 있다.
신륵사 우측을 감쌓고 있는 능선이 내려와 여강과 접하는 것을 일러 옛 사람들은 봉황이 꼬리를 물에 담근다고 멋드러지게 표현했다.
거대한 암반과 절벽으로 이루어져있는 이곳을 아름다운 여강의 백미라 불러도 뭐랄 사람 없을 것이다.
옛 선조들은 거기에 날아갈 듯한 정자가 앉혀놓았으니 바로 강월헌이다.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또다른 이름(휘)에서 유래되었다.
강월헌 바위위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서려있는 소박한 4층 석탑이 서있는데 육신을 벗어 던지고 해탈한 나옹선사의 다비장터로서 마치 그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나옹선사는 시대를 뛰어넘는 걸출한 시인이며 문학가였다.
강월헌 누각에 서니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고 있는 그의 싯구가 바람에 실려와 귓전을 맴돈다.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懶翁禪師)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강월헌에 서서 달을 바라본다
- 바위
1. 만월 (滿月)
달을 따라서 활짝 웃던 글미가
사랑한다 말했을 때
바위에 철석이던 여강이
슬며시 걸음을 멈추더라.
아~ 이 밤도 멈추거라.
2. 한월 (寒月)
강둑에 홀로 남아 찬 바람에 떨던 달이
이 밤의 끝을 묻고
밤새 뒤척이던 여강(麗江)이
강월헌 바위 아래서
철석이며 속삭인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이라고
3. 월(月)
강월헌에 서니 달이 나온다.
나오든 들어가든
여강(麗江)은 저리도 무심한데
부질없는 마음장난에
달을 보고 웃다가 울고
또 울다가 웃었던
참 속절 없는 인생
시란 삶속에 내재된 노래를 길어올리는 행위다.
가슴에 멍울진 그 노래를 토해내는 흥이나 신명 없이 어찌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블로그에 몇 편 끄적거리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시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내겐 아직 시혼(詩魂)이 없나보다.
삶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감수성도 아픔을 참고 그것을 드러내는 능력도 부족하다.
그래도 이렇게 끄적거리는 것은 그날 신륵사 강월헌에서 달을 만났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지기같아서 반가웠던 달이다.
때로는 놓고 싶지 않은 욕망의 모습으로 때로는 끝없는 고뇌의 모습으로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던 저 달이다.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들어가나 보다.
비로소 달이 달로 보인다.
이 작은 깨달음을 노래하고 싶어서 신륵사를 떠나 원주로 가는 동안 읖조리고 또 읖조렸다.
 |
| ⓒ서울포스트 |
(나종화 객원기자 )
[
NEWStory makes
History -
서울포스트.seoulpost.co.kr]
서울포스트 태그와 함께 상업목적 외에 전재·복사·배포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