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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일상의 이런저런 생각으로 찾은 성균관대학교 내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은행나무'

양기용 기자 | 2019/11/16 22:39

[탐방] 일상의 이런저런 생각으로 찾은 성균관대학교 내 '서울문묘 와 성균관(文廟와成均館) 은행나무'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 성균관대학교 내 '서울문묘 와 성균관(文廟와成均館) 은행나무'를 찾아
ⓒ20191116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지난 10월 생업현장에서 퇴근 후 ⓒ서울포스트

 

정리 :

서울문묘와 성균관(서울文廟와成均館, 사적 제143호) : 문묘가 있는 '성균관 일원'을 말함.

서울문묘(서울文廟, 보물 제141호) : 성균관 일원 중 '대성전' 을 말함.

서울문묘의 은행나무 네 그루 중 한 그루 (천연기념물 제59호).

석전대제(釋奠大祭 문묘대제文廟大祭) :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가을을 그냥 비워두기 아쉬웠다. 심신이 곤고한 요즘이라 멀리 계절색을 찾아갈 것은 엄두가 안난다. 대신 지난달 혜화동,명륜동 일대에서 생업을 하며 보았던 성균관대 '서울문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를 찾았다. 서울의 노란은행나무색은  매년 11월11일쯤 절정이더라.

 

1997년, 22년전 11월2일, imf초입에 은행원이던 난 직장커플로 성대유림회관에서 결혼식을 했었었다. 필리핀 보라카이 로 출국 때 860원쯤(?) 하던 환율이 1800원대까지 수직 상승했고, 한달 후 쓴 카드대금으로 1300원대에 결제했었던 기억. 그리고 그 이후부터 땅바닥에 나 앉아 혹독한 시절을 보낸다. 인생의 황금기라는 40대와 50대를 쪽도 못쓰고 그냥 흘려보낸 격이다. 그래도 약 15년 서울포스트 가 좌표를 만들었기에 더 험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60줄을 바라보며 일생에서 중요한 것이 새삼 '효'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가까운 지인도 있으나, 솔직히 살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현재 생업을 같이 하는 세상의 불특정 사람, 그리고 변할 수 없는 직계가족과 형제들이다. 살아오면서 부모에게 불효, 형제간에 못했던 친화가 가장 큰 후회다. 불충,불효에 대한 회한은 언제나 끝없이 남아 있다.

 

오늘, 충효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유학의 본거지 성균관을 찾지만, 나의 후회들과는 별 무관한 걸음이다. 조선은 성리학 숭상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고 백성은 언제나 피폐한 삶을 살야야 했다. 글월 깨우쳤다는 양반 때문에 나라 말아 먹은 것이다. 그게 노무현 이후 문재인을 거치면서 더욱 현란한 사기질로 현현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서양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근대 사고양식이고, 실제는 일본의 무사문화에 조선의 문인계급은 관념의 유희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재인이 법으로 일본의 칼을 이기겠다는 허황된 기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물론 '법률로 일본을 이겼노라'고 써 놓고 니뽄도에 맞아 죽을 일이지만.

 

성균관대를 들어서면 맨 먼저 수 백년 은행나무가 눈에 든다. 그래서 이 학교의 교목이 은행나무다. 입구에 영조가 세운 탕평비(하마비와 탕평비각)가 있고, 외부에 하연대가 있다. 공자를 배향하는 사당인 대성전 마당에 문묘비명이 연혁을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문화재보호랍시고 갑갑할 정도로 감싸 놨다.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으로 성리학,유학을 중시여긴 유림의 집합지. 오늘 찾은 문묘(文廟)는 공자와 중국,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처음엔 133인이었는데 현재는 39위 위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성균관은 고려말 국자감을 성균감으로 다시 성균관으로 돼, 조선을 개국한 후 한양천도로 현재의 명륜동에 1398년 완공했다. 시대의 탕아 연산군 때는 폐쇄하여 유연소(遊宴所)로 만들었고 외침으로 완전 소실되기도 했다.

 

문묘 정문에서 보면, 일직선상에 대성전(大成殿)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 명륜당(明倫堂)은 교육공간으로 지어졌고 대성전 현판은 석봉 한호(한석봉)의 친필로 전해진다. 그리고 500년쯤 된 은행나무 네 그루가 대성전 앞마당 양쪽 귀퉁이에 두 그루, 뒷마당에 두 그루가 나란히 역시 대칭을 이루고 있다. 1519년 윤탁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또는 임진왜란 때 불 타 다시 지은 1604년에 심어졌다는 설이 있는데, 동편 더 큰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돼 있다. 토양적 여건이 좋아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유주(乳柱 젖기둥)까지 늘어진 이 나무는 밑동이 특이하게도 포기배추처럼 풍성하다. 유추해서, 총 네 그루 중 풍채(風采)가 확실히 큰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임란의 화를 면해 500세 잡수셨고, 다른 세 분은 임란 후 심어져 400살 잡수신 것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또 수령이 상당한 회화나무도 있지만 은행나무의 위용에 눌린듯. 

 

노란 나무잎 아래 많은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 만들기에 흥겹다. 한편, 대학논술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이 은행나무를 볼 여유가 없었을지 싶다. (龍) 

 

※ 서울문묘(文廟) - 나무위키 등 자료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문묘라는 명칭은 문선왕묘(文宣王廟) 약자이며, 공자묘라고도 한다. '성균관 대성전'이 조선의 문묘. 중국을 비롯해 정몽주 등 15인과 신라의 설총,최지원, 고려의 안향까지 동국18현이 배향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성행하였으며, 과거제와 서원과 더불어 유교사회 단면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요소였다. 조선조 말기에는 그 규모가 커져 공자 이하 133명을 모시게 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의 신사와 비슷한 개념이다.

 

문묘에 배향되면 선정(先正)으로 인정받아 인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그 배향논의는 매우 신중하고 격론을 거쳐 오랜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는데, 광해군 때 조선오현이 우여곡절 끝에 배향된 이후, 특정 붕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그 이후 배향된 인물들은 배향과 출향을 반복하며 논란이 지속되었다. 즉, 한국의 문묘는 조선시대 판 명예의 전당이라 볼 수 있다.

 

서울의 성균관 및 지방의 향교에 두었는데,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 - 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 일원은 사적 제143호, 이 중 대성전(大成殿)은 보물 제141호로 지정돼 있다.

 

- 석전대제(釋奠大祭 문묘대제文廟大祭) :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제·석채(釋菜)·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하며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한다. 석전대제는 문묘제례악과 그 의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1986년 11월 1일에 성균관의 석전대제보존회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하였다. →문묘제례악, 석전(釋奠)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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