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포스트탐방] 악성 우륵(樂聖 于勒)이 가야금(伽耶琴)을 켰던 충주 '탄금대(彈琴臺),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申砬)이 배수의 진을 치고 전사한 '열두대'
-SPn 서울포스트, (마이 네임 이스) 량기룡(梁奇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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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륵의 탄금대 터를 지나와 비운의 장군 신립의 열두대. 한강과 달천강이 합수하는 곳, 저 너머 남한강 위는 깍아 지른 낭떠러지기다. ⓒ20210926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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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금대교 위 버스에서 찍은 용섬과 탄금대,열두대. 멀리 충주의 주산인 계명산. ⓒ서울포스트자료 |
(↓ 탐방사진은 저 아래.)
지극히 사견을 먼저 말하자면, 탄금대와 깊은 관련 있는 우륵 은 가야국이 어려워지자 신라에 귀화한(망명) 인물로 도망자요,배신자요,변절자고, 신립장군은 적진에 몰려 자살한 비겁한 장군이다.
신립장군은 이순신장군처럼 적화살에 죽은 것도 아니고 전술을 잘못 택한 이유도 있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무모한 방어선으로 탄금대 배수진(背水陣)을 구축했다가 8천여 병사들이 몰살당하게 되자 한강에 투신 자살을 택했다. 장군과 관련 있음직한 설화는 저 아래쪽 창동리 마애석불의 침통한 표정으로 추측을 한단다.
다시, 우륵의 가야금은 원래 가야의 거문고* 란 뜻이다. 자료에 의하면, 가야금은 12줄이며 중국의 쟁(箏)이라는 악기를 본 따 가야에서 만들어진 악기로 연주는 우륵 이 가장 유명, 거문고는 줄이 6개, 고구려(552년경)에서 왕산악이 중국 진나라의 칠현금을 고쳐 만든 것이으로 연주자는 박연 이 유명. 모두 오동나무로 만든다.
[* 가야국 가야금(加耶國 加耶琴 또는 伽倻國 伽倻琴)]
지난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탐방길에서도 보았지만 탄금대는 달천(달천강)과 한강(남한강)이 만난 두물머리(합수부)에 돌출된 산으로, 양 옆이 강이고 뒤쪽이 낭떨어지기라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열두대 는 그 정점에 있고 어원을 알 수 없는 고유명사지만 '열(熱)나게'라는 뜻으로 해석들 한다. 그러나 필자 소견으로는, 가야금의 열두줄과 관련이 있을지 싶은 십이대(十二臺)라는 말도 있고, 임란의 최후로 목이 베어진 곳이라는 절두대(切頭臺)를 차마 그렇게 부르기 어려워 걍 애둘러 비슷한 발음 '열두' 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강 서울 양화진에 천주교 박해로 목을 베었다는 절두산성지가 있음에 든 생각이다. 추가로, 같은 위치지만 우륵의 탄금대와 신립의 열두대는 엄밀히 다르게 봐야하지 않을까.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싸움에서 활약, 포로가 되었다가 김자점이 역모죄를 씌워 죽은 임경업장군도 충주 달천강변이 고향이라고 한다.
[※ 임경업장군은 영조3년 임금이 직접 충렬사라는 이름을 지어준 '임충민공 충렬사'가 충주 단원동에 사당이 지어져 충민공 임경업장군을 기리고 있으며 묘는 충주시 풍동에 있다. 林忠愍公 忠烈祠, 忠愍公 林慶業]
어느 나라든 역사란 자국사관이다. 지배자가 국민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철저한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객관성이 상당히 배제된다. 대표적으로, 충주의 옛지명은 '국원(國原)'인데, 이게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에서 기원, 이후 신라 진흥왕때 이 지역을 점령하여 국원경으로, 통일신라때 중원경* 이 되었다. 고구려땅의 징표는 중원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 자료: 충주는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가 미을성(未乙省)이라 하였으며, 고구려 장수왕 때(약 450년 전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국원성(國原城)이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충주를 차지하고 진흥왕 18년에는 소경(小京)을 삼고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국원경(國原京)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하였다.]
현재 남한은 신라사관, 북한은 고구려사관이라서 통일후에는 각종 자료들이 논란의 대상이다. 대표적으로 추사 김정희가 새겨 넣어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가 된 국보제3호 북한산비는 논란이 클듯, 그가 비문을 손댐으로써 역사조작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선의 부자장군 아버지 신립, 그의 아들 신경진 - 신립장군은 북방 여진족(금나라, 후에 청)과 싸우다 선조때 임진왜란 왜군과의 전투에 전사, 아버지 공을 받은 음서제도로 무과에 오른 신경진장군은 인조대 청나라와 병자호란을 겪으며 포로가 되기도 했다. 우리동네(서울 중랑구 용마공원입구)에 평산 신씨 묘역이 있는데, 거기 충익공 신경진 묘, 또 신도비는 엄청난 규모와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서 있다(忠翼公申景禛).
[※ 신립장군묘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1986년 9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돼 있으며, 탄금대에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산 1-1 대흥사 뒤에 있다.]
탄금대 충혼탑은 1955년 11월에 세워진 국내 가장 오래된 탑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새겨져 있고, 충장공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 탄금정,열두대에서 내려 본 남한강의 아찔한 절벽, 상수리나무길과 소나무길에 잘 관리돼 있는 곳이다. 탄금대교와 우륵대교 아래 탄금대 자전거길을 거쳐 새로 건립된 호국탑,월남전참전기념탑,가을 햇살이 따가운 칠금리자랑비 길을 따라 반송이 잘 정비된 도로를 걸었다.
500년전, 1592년부터 임진왜란으로 조선땅에 곡소리가 날 때부터 1597년 정유재란을 겪고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어 왜군이 철수할 때까지 조선인은 귀가 베이고 코가 베어 귀무덤,코무덤이 산성을 이뤘고, 그 두 난리는 왜놈들이 조선인을 철저하게 살육하고 도륙한 전장이었다. 전쟁사는 포에니전쟁때도, 십자군 때도 늘 약소자가 도륙당해 피의 강을 만들었었다.
인조반정 공신이자 청나라 병자호란 간신이라고 한 김자점의 이유있는 항변을 보면, 효종 때 역모죄로 능지처첨 당했지만, 그가 인조가 갇힌 남한산성 배후 공격을 해태한 것은 왕 주변의 권력자들이 별로 한 것 없이 지들만 해먹는 카르텔 을 형성하고 죽어나는 것은 전장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란다. 맞다, 독립협회 회장까지 한 이완용이 왜 친일로 돌아 섰을까.
결국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동안 조선인구 1/3이 죽어 사라졌다고 한다. 선조 당시 호구조사에 약 280만 명이었는데, 난리 전인지 후인지 모르나 어쨌든 100만명에서 150만명이 왜구에 의해 죽어간 처절한 역사다.
역사는 배운대로, 기록된대로 믿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자기 스스로 '어떤 현상'을 꿰뚫어 전후좌우상하를 종합할 능력이 없으면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내가 15년 인터넷언론합네,하면서 체득한 것은 노무현이나 문재인이나 이재명이나 저 새끼들이 째진 입으로 지껄인 것은 다 권력욕에 눈멀어 국민을 현혹시키는 사기질이라는 것. 그놈들 공통점은 지 스스로만을 변호하는 변호사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놈들이 나를,우리를 누구든 변호해 주는 것은 결코 없는 법이다.
아직 미개한 대한민국 국민들, 정신 차려라!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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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성 우륵의 자리 '탄금대彈琴臺' (다음포털 자료검색)
충북 충주시 소재, 명승 제42호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반기며 국원(충주)에 거주하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청년인 법지, 계곡, 만덕을 선발해 악(樂)을 배우게 하고 우륵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런 연유로 우륵은 만년에 멸망한 가야국을 떠나 충주에 우거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우륵은 이곳의 풍치를 탐미하여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 이곳이 바로 우륵이 금(琴)을 탄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탄금대(彈琴臺)’다.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고 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탄금대는 충주시 근처에 있는 대문산(108m)의 정상을 지칭한다.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도는 탄금대는 남한강과 너른 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상부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과 남산이 솟아 있으며 아래로는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탄금대는 옛날부터 유명한 지명으로 지리지와 고지도 등 각종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탄금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절벽은 낭떠러지로 높이가 20여 길이요, 절벽 위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후세 사람이 이곳을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는 “충주 서쪽으로 8리에 위치하며, 강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라고 하여 가야금을 타며 쉬던 곳이란 의미로 쓰였다. 이밖에도 《해동지도(海東地圖)》,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 등 다수의 고지도에 탄금대 지명이 나타난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사람으로 490년경 대가야의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우륵의 고향인 성열현은 현재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치적 · 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던 곳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받아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가야금은 중국의 악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가야국의 혼이 담긴 새로운 악기로 만든 것이다.
가야금은 우리의 고유한 악기다. 본래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며 가야인의 천문의식을 담고 있다. 가야금은 위가 둥글고 아래가 평평한데 이것은 천원지방의 천문관을 나타내며, 12개의 줄은 1년 12달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가야국이 예악(禮樂)을 중시한 문화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악으로서 백성을 통치하고자 했던 가야의 높은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에서 만들어진 가야금은 고국을 떠나 충주에서 탄금대라는 장소와 결합하여 장소적 의미를 취하게 된다. 가야국보다는 오히려 충주가 가야금의 고을이 된 것이다.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참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도순변사였던 신립(申砬)은 8,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에 맞서 탄금대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신립은 이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탄금대 북쪽 절벽에는 열두대가 위치하고 있다. 열두대의 지명에 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바위의 층계가 12개이기 때문에 열두대라 하기도 하고, 절벽 아래 물이 12번 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교전 중 달구어진 화살을 식히느라 12번을 오르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열두대 아래는 깊은 소가 있는데 이를 양진명소라 한다. 이곳에 뱃길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선주, 선박 상인들은 양진명소에서 안전과 번영을 빌었다고 한다.
탄금대에는 전쟁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이 있다. 정상 주위에 남아 있는 오래된 토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토성은 4세기 중후반에 탄금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철을 생산하는 세력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제와 관련된 유물만이 출토되어 고구려나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에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탄금대는 충주의 시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명소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의 탐방은 물론 도시공원으로도 이용되어 왔다. 그래서 탄금대에는 공원 시설이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전쟁의 역사성과 관련된 궁도장을 비롯해 우륵의 가야금과 관련된 공원 시설, 충혼탑, 야외음악당, 특히 공원의 효과적인 활용을 위한 공원도로도 많이 개설되어 있다. 오랫동안 도시공원으로 이용되었던 탄금대는 뒤늦게 국가지정 명승으로 그 장소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시민들의 공원으로서도 잘 활용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충주시의 명소인 탄금대는 나라를 잃고 정복국의 신민이 되어 변방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악성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한의 울림으로 퍼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온 왜군에 맞서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장수 신립의 함성이 메아리쳐 우렁차게 들려오는 듯하다. 지난날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했던 명승 탄금대는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인 경승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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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금대 (한국콘텐츠진흥원자료)
탄금대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 전한다.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작은 산으로 밑으로 남한강과 접하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우륵은 가실왕(嘉悉王) 당시의 가야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계고 (階古)·만덕(萬德)을 뽑아보내 악(樂)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곳을 우거지(寓居地)로 삼고 풍치를 상미하며 산상대석(山上臺石)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 연유하여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8,000여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와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신립은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천추의 한을 품고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100척이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金容殷)이 건립하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찬한 탄금대비가 있다. 또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 신립장군 순절비, 조웅장군 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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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장공 신립장군 (忠壯公申砬將軍)
조선시대 1546년(명종 1)~1592년(선조 25), 본관 평산
여진족을 다스린 용장, 신립
임진왜란 발발과 조선의 상황
탄금대에 친 배수진, 패전을 기록하다
신립이 패전한 이유
여진족을 다스린 용장, 신립
역사 속에서 신립(申砬) 장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충주 전투에서 패한 패장으로 기록되었다. 초기에 밀려드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실패함으로써 한양으로 향하는 길을 내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만이 신립을 설명하는 전부는 될 수 없다. 신립이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전란에서 패하고 전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전까지 그는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대파한 용장(勇將)으로 이름을 남겼다.
신립은 1546년(명종 1)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 자는 입지(立之)이며, 아버지는 생원 신화국(申華國)이다. 신립은 1567년(명종 22) 2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 등을 역임하고 진주판관을 지냈다.
신립이 장수로 용맹을 만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재직할 때였다. 당시 두만강 주변에 살던 여진족 추장으로 니탕개(尼湯介)라는 자가 있었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예의를 갖추고 복종할 뜻을 보여 조정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한 바 있었다. 그런데 니탕개는 1583년(선조 16) 1월에 인근의 여진족을 모아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경원부(慶源府)로 침입해 왔다. 조정에서는 급히 군사를 파견했고, 이때 신립이 평소에 수하로 거느렸던 기병 500명을 이끌고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토벌에 나섰다.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반란군의 수는 1만여 명으로 신립의 군사는 수적으로는 많이 불리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정예부대인데다 신립의 장수로서의 투지와 용맹으로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소탕하고 6진을 온건히 보존했다. 이때 신립은 도망가는 적들을 두만강 건너까지 추적했다고 한다. 이 전공으로 신립은 1584년(선조 17)에 함경도북병사가 되었으며,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신립은 1588년(선조 21)에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에 출정해 적병 20명을 목 베고, 말 세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이로써 그는 여진족에게는 두려운 장수로 알려졌으며, 조정에서도 무관으로서의 입지가 높았다.
임진왜란 발발과 조선의 상황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전쟁에 대한 풍문과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애써 전쟁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런 조선을 비웃듯이 일본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다. 이때부터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정유재란(丁酉再亂)까지 포함해 7년 10개월 동안 이어졌다.
일본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통일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업도시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부족한데다 토지 재분배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은 물론 명나라까지 넘보는 전쟁에 눈을 돌렸다. 그들은 이미 서양에서 건너온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고, 또 격렬했던 전국 시대를 통해 전쟁 수행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을 통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힘을 외부로 돌려 세력을 축소하고 경제적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반면 조선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은 건국 후 변방에서 일어난 소요 외에는 큰 외침 없이 200년을 지낸 터였다. 군사 시설은 물론이요, 병기, 군사 훈련까지 모두 전쟁을 맞기에는 부실했다. 게다가 선조가 즉위한 후 사림이 정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면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느라 국방에 힘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조선에게도 전쟁에 대비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은 여러 차례 대륙을 정복하겠다며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을 함께 치자고 종용하는가 하면,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청했다. 조선에서는 여러 논란 끝에 1590년(선조 23) 3월경에 일본에 통신사 일행을 보냈다. 이때 통신정사는 황윤길(黃允吉), 부사는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은 허성(許筬)이었다. 그런데 1년 뒤 일본에 다녀온 이들의 보고 내용이 사뭇 달랐다. 실록에 실린 기록을 보자.
탄금대에 친 배수진, 패전을 기록하다
전쟁이 없으리라는 조선의 막연한 희망을 무너뜨리고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의 20여만 병력이 부산진에 도착했고, 무방비였던 부산은 초토화되었다.
이후 왜군이 그야말로 물밀 듯이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상주에 내려 보낸 뒤 여진족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에 임명했다. 왕은 신립에게 직접 보검을 하사한 뒤 충주로 파견했다. 충주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
신립은 4월 26일 죄를 지어 감옥에 있던 의주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으로 삼고 8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 남쪽 단월역(丹月驛)에 진영을 설치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는 조령 남쪽 문경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신립은 김여물과 휘하 장수 몇 명을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조령의 지형을 정찰한 김여물은 신립에게 의견을 냈다.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리고 높은 언덕을 점거해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신립은 찬성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신립은 과거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조련된 기마병으로 큰 승리를 거머쥔 바 있었다. 그래서 기마병으로 일본군을 상대한다면 승산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갔다.
이튿날인 27일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로 나가 남한강과 달천에 주둔하고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이때 일본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그런데 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상주에서 패배한 뒤 합류한 이일이 모두 척후로 전방에 있다가 적에게 차단당해 정세 보고가 단절되고 말았다. 드디어 신립의 군대와 일본군이 맞닥뜨리니, 그 정황을 기록에서 살펴보자.
신립이 패전한 이유
신립이 충주를 방어하지 못하면서 일본군은 기세를 이어 한양까지 단숨에 진격했고, 선조는 끝내 궁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다. 신립이 충주 전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결전에 임했는데도 비참하게 패배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전술의 실패를 들 수 있다. 김여물 이하 여러 장수들은 수적으로 불리하니 조령의 천연지형을 이용해 적들을 협곡으로 끌어들인 다음 양쪽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 끝내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쳤던 승전의 기억에 매몰돼 기병을 고집했고, 결국 참담하게 패했다. 개활지라고는 하나 논이 많고 습지가 많은 충주 땅은 기병의 기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립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신립은 평소 일본군을 왜노(倭奴)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만함도 전장에 선 장수로서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요인이었다.
그다음으로 충주 전투가 패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는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신립이 지형을 세밀하게 살피고 참모들의 전술을 주의 깊게 들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일본이 서양식 조총을 대량 확보하고 잘 조련된 군사와 조직력을 가진 데 반해 조선은 무기라고는 녹슨 활과 칼이 대다수였다.
병력은 수적으로 불리할 뿐 아니라 오랜 평화로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전장에서 군사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장수들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해 전략과 전술이 허술했다. 전쟁 초기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전력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도 신립이 패장이 된 이유다.
당시 조선 군제도 패배의 원인이었다. 기존 군제는 분군법(分軍法)인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이는 작전 지역에 군사들이 모이면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과 같이 시간을 다투는 전면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신립의 경우도 전쟁이 일어나고 급하게 충주에 파견돼 충주의 지리적 특성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략 수립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유성룡은 진관 체제(鎭管體制)를 주장했다. 지방군을 도단위(道單位)로 진관(鎭管)을 두고 그 밑에 군현 단위로 전국의 방위 체제를 하나로 묶자는 것이다. 이러한 진관 체제는 진관마다 그 지역을 잘 아는 지휘관을 두어 변란이 생겼을 때 진관 단위로 적과 싸우거나 지키게 하는 것으로, 한 진관이 무너져도 다음 진관이 굳게 지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본디 조선의 군제는 진관 체제였으나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변이 있은 후 제승방략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제승방략 체제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자, 1593년(선조 26)에 유성룡이 도체찰사로 전쟁을 진두지휘하면서 진관 체제로 다시 복구할 것을 주장했다.
어쨌든 신립은 임진왜란 초기에 전세를 어렵게 만든 명백한 패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충주 지방에는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신립이 우연히 어느 민가에 묵었다가 그 집 처녀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처녀가 신립에게 자신을 배필로 삼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신립이 이를 거절했다. 결국 상심한 처녀가 자살을 해서 귀신이 되었는데, 바로 그 처녀 귀신이 신립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비극적인 패배를 당하고 강에 빠져 목숨을 잃은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러한 이야기가 생겼을까. 그래도 신립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장(忠將)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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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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