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난 발표 글 모음 2 ('추락하는 者, 날개 달렸네!' 外)(6~10편)
양기용 기자 | 2005/12/26 00:22
10.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우리는 웃고 있는 상태가 휴전 상태였다
양기용 기자, 2005-06-11 오후 2:51:00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미국,희곡,T.윌리암스,1947초연)
이 작품은 뼈대있는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란 한 여성의 파란한 인생을 다루고 있다. 교양과 체통을 강요받고 성장한 여성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이, 시대가 강요하는 이념에 수용되지 못하는 블랑슈를 통해 본 메시지가 나중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비비안 리'가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한다.
이념은 사회적 통념을 뛰어 넘는다. 정비석이 발표한 '자유부인'이나 '애마부인' '젖소부인'등의 시리즈물이 우리 사회의 한 주류를 이룬 시절에도, 우리들의 체통은 3류계로 분류하면서 돌아서서 도색잡지를 들여다 보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댔다.
윌리암스의 희곡은 일상적 인간속의 이념이 자연스레 표출되는 경로를 다룸으로서 관객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극중의 주인공이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자기가 안식처라고 믿어왔던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기에 이른다. 불같은 이념에 타오르는 블랑슈가 내 몰린 처절함으로 그가 겪는 소외감이 종국에는 죄를 덧씌운 우리들을 응징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우리 자신의 죄과를 묻는 메시지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념의 지배에 놓여있다. 이념과 그 허울을 수시로 바꾸기도 하고 바뀌어지기도 한다. 누구든 이념이라는 자의식의 흐름에서 켤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념이라는 이름의 전차
젊었을 적, 만나기만 하면 다툰 친구가 있었다. 당시의 나는 남도의 공대를 다녔고 녀석은 미대를 다녔었다. 내 딴에는 이념적으로 충돌할 이유가 없는 성향의 친구로 알았는데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수 년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그 투사적인 친구와는 밥먹다가도 싸우고 차마시다가도 싸웠다. 서로는 지독한 웬수들이었다. 어휘 하나가지고도 바로 육박전이 시작되었으니, 우리는 웃고 있는 상태가 휴전상황인 셈이었다. 광주에서였지만 나는 삶의 역정상 투사가 될 수 없었다. 마침내 올 F를 받고는 낙향을 결심했다.
가로쓰기로 써진 당시의 책 겉표지가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그후, 영한 대역본도 읽어 봤지만 큰 감동은 없었다. 그러나, 하수상한 시절에 문득 떠오름은 내가 몹시 이념적이어서 일까? 줄거리에서의 '욕망'을 '이념'으로 대체시켜도 흐름에 하등의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 , 그 친구와의 지랄 같았던 일들이 주마등이 되어..
이념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 앞에서는 뵈는 게 없다. '이념'과 '종교'도 등치가 가능(동소체같이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가 같다는 의미. 즉, 숯과 다이아몬드는 탄소원자 'C'로 구성되어 있다)하기에 우리 속에 박힌, 이념적 종교적 행위는 인간을 불구자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런 불구자 앞에서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을 누가 감히 장애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의 이념은 세포분열 중인다. 잔뜩, 영근 봉숭아씨 마냥 손대면 툭 터질 것같은 태세다. 이성적 판단을 억압하는 사회시스템의 변화가 깨지지 않는 한, 우리는 이제 자신의 죄과를 스스로 단죄할 능력을 상실케 되고야 말았다.
나의 손으로 망가뜨린 삼각형
문학비평가인 'R.지라르'는 그의 저서 <낭만적 거짓>에서 작품의 구도를 '삼각형의 욕망'으로 규정하곤 한다. 인간의 폭력성의 근원을 타자지향적인 현대인에서 찾는다. '보봐바리부인 - 삼류소설 주인공 - 연인'처럼...
우리들의 '빠 - 저급한 군중 - 찌그러진 영웅' - 비슷하지 않는가? 이러한 군중들은 앞을 분간 못하는 무한돗수의 안경을 끼고 마음껏 페인트칠을 하고다니며 외친다. 제1성은 "ㄴ빠!!!"요, 제2성은 "ㅇ빠!!!"요, ㅊ,ㅂ,ㄱ,ㅇ.... 이 대립적 폭력이 교조주의를 벗지 못한 또다른 욕망을 낳을 것이며, 그 욕망은 'id이드'와 'ego에고'에 의해 다른' ism이즘'으로 파생되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각종 빠돌이 빠순이들이 대한민국을 야금야금 갉아먹을 것이다. 나는, 빠의 출현으로 한국정치의 20년 후퇴를 공언했고, 그런 빠류는 결국 스스로 벌레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진작이 경고했었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를 엿먹이고 자식까지 내팽개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빠' 앞에서 모든 신성한 행위는 종말적 징후로 뒤바뀐다. 그들 눈앞에 기존의 모든 가치는 전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즈음에는 꼭 마르틴 루터의 외침이 생각난다.
...(이념이) 신앙이 비단 논리만 부정할 뿐만 아니라 도덕도 부정한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 죄라는 관념을 송두리 채 폐기시켜 버리게 하는 것이다.
2005-06-11 오후 2:51:00 양기용 기자 : 취재국장/편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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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포커스] 디지탈이냐? 아날로그냐?
랜덤을 타면 아름다운 가상공간을 만난다
양기용 기자, 2005-06-10 오전 3:05:18
디지탈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람도 고물 취급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리모콘 정도를 다룰 능력이 아니라, 하루하루 변화된 '시퀀스 시대'에 살기 위해서 디지탈화는 우리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견딜 능력을 요구한다.
시대가 시간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매 시간을 적응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유저)'의 개념은 '개발자'까지를 포함한다. "말만 해도 알아서 처리해 줄 컴퓨터 시대가 도래할 날이 온다"고 장담했던 나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if]라는 가정과 명령어를 자기 환경에 따라 바꿔야 하고, 각각의 속성을 충분히 숙지해야 쌍방향 소통의 충돌위험을 피하는 것이다.(*여기에서의 충돌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임)
오늘도 랜덤을 타다가 많은 아름다운 가상공간들을 접했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공간을 꾸민 사람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고, 자판을 두드리는 이의 체온까지도 와닿는 듯한 따뜻한 댓글도 보았다. 글을 '봄'으로써 타인을 체험하는 '신기함'을 떠올린다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곧, 사용자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진공관 => 트랜지스터 => 반도체의 변천처럼, 세대교체된 첨단 기술력이 시간을 통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것들이 디지탈로 치환된 세상에 산다고 해도, 사이버 섹스가 육신의 본능을 잠재울 수 없는 몰감성의 기능과 가상의 자녀를 양육할 시대는 올 수 없다는 얘기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대지로 빚은 육체이며 대기의 입김에 의해 탄생된 신의 피조물일 뿐인 것이다.
디지탈의 최대 단점은 역동성의 부재다. 편리함와 순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얇음은 얻었으나, 잃어버린 것이 더욱 많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가만이 앉아서 우주를 넘나든다고 해서 권장할 만한 지고의 선(善)이 아님은, 굳이 앉아있는 타성으로부터 오는 육체적 퇴행을 '패스트푸드'만 먹은 사람의 부작용을 예로 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육체란 디지탈 방식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소멸시효를 연장하려고 거금을 들여 피트니스에서 땀흘리는 저들을 보라!
처음 우리나라에 테니스가 들어왔을 때가 고종 몇 년인 모양이다. 미국인 사절이 코트에서 땀을 뻘뻘흘리며 힘들게 치는 것을 보고 고종이 말했단다. "그 힘든 것, 신하들을 시키면 알아서 다 할텐데 무얼 그리 땀을 내시오?"
ㅎ건설의 100억짜리 당좌수표가 제시돼 어찌 처리할까 절치 부심한 시절보다, 월말결산에 날밤을 세우던 그 시절보다, 버티칼대로 재단하고 언 땅을 곡괭이질해서 얻어진 재화의 밥맛이 더 달다는 것을.. 야릇한 분내음과.. 계산에 골몰한 정신의 오물을 건강한 땀으로 배설해 낸 뒤에 얻어진 밤의 향연이 서너배 더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사 알았다.
디지탈이 스칼라값이라면 아날로그는 방향성이 있는 벡타값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 1살에서 100세까지는 수의 절대값이 아닌 벡타성이 있다. 방향을 갖고 흘러가는 것이다. 태양의 운항(지구의 자전)이 시계를 만들어 주었듯이, 절대수치를 나타내는 시계(엄밀히 시계가 아닌 측정계산기다)가 세계신기록을 수치로 말하는데 꼭 필요할런지는 몰라도, 역시나 시계의 명품은 태양의 운항을 나타내 주는 스위스제 '롤렉스'이다, 작은 침이 두바퀴를 돌면 하루가 간다는...
우리들은 너무 한쪽 만을 고집하지는 아니한가? 그 중에는 쉬이 명품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고물들은 가만이 앉아서 "내 대신 테니스 좀 쳐주라", "보고서 읽기 싫으니 한마디로 써서 눈앞에 갖다 대라", "귀찮다! 니들이 읽고 실행해라! 나는 군림하겠다!"...결국엔, "밥먹기 성가시니 내 대신 밥좀 먹어 주라!"
결국엔, "밥먹기 성가시니 내 대신 밥좀 먹어 주라!"
이런 디지탈로만 사고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안봐도 안다.
2005-06-10 오전 3:05:18 양기용 기자 : 취재국장/편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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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포토] 참으로 아름다운 현충원
누가 꽃을?, 그 시절 선임하사의 손길 잊을 수가 없어..
양기용 기자, 2005-06-07 오전 1:58:14
현충일의 정의
-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희생한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
유래 및 연혁
- 조선시대 병사의 유해를 매장한 날
- '55. 7.15 국립묘지로 창설
- '56. 4.19 현충일(6.6)을 공휴일로 정함(대통령령)
- '70. 1. 9 연1회 현충식 거행(국립묘지령, 대통령령)
- '82. 5.15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 규정
- '96. 6 .1 국립현충원으로 개명
현충일에 하는 일
현충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조상들의 넋을 추모하는 날이므로 국민 모두는 경건한 마음을 갖고,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 다시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현충일 아침에는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각 가정이나 기관에서는 반기(半旗)를 게양하고, 현충일 아침 10시에는 순국선열의 넋을 위로하는 묵념을 하고, 국립 현충원, 국립묘지,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등 위령을 모신곳을 방문하여 헌화를 한다
오랜만에 방문한 현충원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5월말, 오랜만에 방문한 현충원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통통해진 신록은 생기를 맘껏 걷어 올렸으며, 쑥버물 처럼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분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대기의 입자를 뿌였게 띄운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 쪼이는 가운데 까치떼가 먼 잔디광장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정문에서 꽃 한다발을 사서 한참 서성거렸습니다. '어느 섹타더라? 38***? 39***?' 하도 긴 세월을 지나쳐 온 탓으로 희미한 기억에 의지하며 낑낑대었습니다. 8년전에 마누라랑 찾은 현충일, 얼굴도 어렴풋한 사모와 장성한 아들을 보고 멋적게 머리만 긁은 것이 살아 있는 나의 몫이었습니다.
'꽃을 누가 놔뒀는지 궁금했었는데...'
'예에...'
그 시절, 전쟁상황이 선임하사의 병세를 더 악화시켰고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된 후 마지막으로 그 분을 뵈었습니다. 믿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 군무로 복귀하는 나를 배웅해 주셨던 손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찌 그 순간을 뒤로하고 왔는지 도저히 기억해 낼 수 없습니다. 귀대하여 선임하사의 버거웠던 업무를 고스란히 떠맡아 무탈하게 5년의 복무를 해냈던 것도 애띤 병정이었던 나를 유난히 이뻐해 주셨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의 잡풀을 정리하고 꽃을 드리며 재배했습니다. 세상 속, 남남으로 만나 이토록 긴 세월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우리 선임하사 한분만은 아닐 것입니다. 연등은 진작에 보았기에 그날이 초파일인 줄도 몰랐고 전날까지 사람들과 심하게 다투고 묘비명 앞에 서 있어 보니, 새삼 인간이란 초라하기 그지 없는 미물에 불과 함을 느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까지 가세한 집단왕따가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추하게 지껄였던 업보는 자신들이 고스란히 안고 갈 일일진데, 무엇이 이토록 예각으로 우리를 찔러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다.." 그날은 내 업보의 양을 헤아리면서 '하루를 접으며'라는 제하에 붙여, 모든 이의 지지자이자 중생인 그들의 마음이 넉넉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맛본 한강의 바람이 상쾌하기만한 늦은 오후였습니다.
2005-06-07 오전 1:58:14 양기용 기자 : 취재국장/편집2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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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포커스] 훔쳐보는 사람 훔쳐보기
나는 그 여배우가 거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양기용 기자, 2005-06-04 오후 11:24:16
며칠전 단성사(극장) 앞에서 약속이 있었다. 시간을 수 십분 넘기고도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크게 무료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사람을 구경하는 것은 참 재미난 일이라고 했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젖히는 이, 소녀티를 못 벗었는데도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 아예 엉겨붙어 걷는 초기 연애자들, 껌을 질겅질겅 씹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하얀 이를 빛나게 드러내고 나누는 대화들, '짧은 스커트' '하얀 살집' '보일듯 말듯한 가슴살', 누가 뭐라고 해도 훔쳐 보는 재미야말로 스릴 만점이다.
훔쳐보며 낄낄대는 것은 관음증의 일종인데, 특정인에 지나치면 스토커가 되고 관심 밖이면 방관자가 되고 꼴보기 싫으면 이지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적당한 거리의 관심으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도 껏 바라보는 기준도 애매하다. 어느 곳을? 어떤 눈으로 봐야 하는지? 어떤 말로 대화해야 하는지?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소위 '성희롱의 기준'으로 정해져 일선에 배포되었다. 특정 부위를 빤히 쳐다보면 성희롱에 속한다. 폭력범의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사팔뜨기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스킨쉽도 제한 대상이었으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목적성을 가지고 근접했다가는 개망신 당하기 쉽상이다.(* 스커트 차림을 보는 성희롱의 기준 : 그냥 힐끔힐끔 표 안나게 보는 정도는 괜찮지만 상대방이 불쾌할 정도로 빤히 쳐다본다 든지.. 몸을 숙여서 올려본다 든지 하면 성희롱입니다. 쳐다보면서 히죽히죽 웃거나 느끼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맛을 다시거나 하면...)
그러나, 그날 <연애의 목적>여배우의 차림에 길거리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쏘아 댔다. 나의 눈도 확 잡아 땡겨간 것이다. 허리둘레 살을 드러낸, 헬쓰복 같은 가슴 서포터 차림으로 종로2가 쪽 횡단보도를 보무 당당히 건너는 모습이 "볼 놈은 봐라! 나는 느이들의 시선을 즐긴다."라는 피관음증의 표출은 아닌지??
알프레드 히치콕이 다룬 영화들은 상당히 사이키 하다. 훔쳐보며 만족하는 인간의 내면심리를 송곳처럼 그려낸 작품이 많은데, 난해하고 지루한 면도 있다. 대신 리차드 도너의 영화 <컨스피러시>는 가로등에 기댄 남주인공(멜 깁슨)이 2층 창가에서 런닝머신을 하고 있는 여주인공(쥴리아 로버츠)의 아름다운 몸매를 훔쳐보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네요(Can't take my eyes off you)'라는 음악이 말해 주듯이, 음모 편집자들의 음모에 처한 깁슨이 성격이 다른 음모에 처한 로버츠를 읽어 낸다. 남모르는 사람으로 만나서 각자의 음모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고 모든 진실을 알아낸다.
그런가하면 샤론스톤이 주연한 사이코 스릴러물 <슬리버>에도 스톤의 모습을 훔쳐보는 볼드윈이 있는가하면, 저격용 총 렌즈 십자위에 젖가슴을 올려 놓고 야릇한 미소를 짓다가 임무를 그르치는 머저리 킬러도 영화에서는 곧잘 나온다.
'나는 누구를 저격하겠다'고 선언한 정치판의 머저리들은 다 어디로 갔나! DJ와 박근혜 대표가 통화했다는 것이 음모이고, 민주당 대변인이 민.열합당을 간접적으로 피력(3일 BBS라디오 인터뷰)한 것이 음모라면 도대체 누가 진실을 밝혀야 하는가!
정치판을 구경하는 재미는 거리의 그것 만큼이나 재미있는 일이다. 더욱이 일회용 밴드로 가슴만 가린 것 같은 차림으로 활보하는 사람을 훔쳐보는 일이란 두 배로 신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훔쳐보는 사람의 기쁨까지 오롯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훔쳐보는 재미의 백미고 보면.. 영화속 멍청이 같은 스나이퍼들이 있어 주기에 나는 가끔 폭소라도 터뜨리는 것이다.
2005-06-04 오후 11: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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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커스] 추락하는 者, 날개 달렸네!
배워서 바보돼 가는 사람들, 추락에 날개가 있나?
양기용 기자, 2005-06-02 오후 2:08:32
유희는 끝났다
- 잉게보르크 바하만 -
<전략>
지금은 대추야자의 씨앗이 움트는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모든 이에게 날개가 달렸네요.
가난한 이의 수의에 장식단을 박는 것은 붉은 골무,
당신의 심낭엽(心囊葉)이 나의 봉인 위에 떨어지네요.
<하략>
주) 완전한 사랑을 겨누는 것은 무한한 비상의 행위이며,죽음,수의,심낭염을 불사한다.
먼저, 잉게보르크 바하만에 대해 살펴 보자. 전후 독일 문단에 나타난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바하만은 1926년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인스부룩, 그라쯔, 비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철학과 법률, 음악 등을 공부하였다. 1950년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 '유예된 시간' '큰곰좌에의 호소', 단편집 '30세' '동시에', 장편 '말리나'외 다수의 방송극을 발표, 활발한 작가 생활을 하였으나 73년 로마에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다음은,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보자.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인 임형빈이 서현주에게 방아쇠를 당김에서 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무대는 이태원에서 출발하여 미국을 거쳐 종착지가 오스트리아로 설정된다. 각기 보수와 개방에 함몰된 형상에서 사랑과 쎅스에 관한 인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으로 이 소설은 종을 맞는다.
이문열은 바하만의 '유희는 끝났다'에 철저히 포커스를 맞추면서 소설 한편을 만들어 갔다. 저 4행의 싯구와 짧은 주석을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줄거리를 가지고 책 한권을 만들어 내는 천재성을 보인 것이다. 80년대 후반이니까 이념을 입에 걸어야만 지성인 대열에 끼일 시기에 이 소설의 발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마광수의 '장미여관' 논쟁이 일던 시기였기에, 그로부터 민족문학작가협회 입장에서는 두고 두고 테러대상 1,2호를 다툰 인물들 이었다.
소위, 왼쪽 뇌의 지식인들이 우상이었던 시절, 오른쪽 뇌의 소유자 였던 마광수는 폭발적인 수강생과 독자를 확보해 나갔다. 이념에만 덮혀 있어야 했던 원초적 성욕이 비로서 마광수라는 도폭선을 맞아 불꽃을 붙인 것이다. 이문열도 오른뇌의 소유자로 치부 되었지만 필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양 뇌를 두루 갖춘 글쟁이 이라고 본다.
당시, 논쟁 과정에서 '추락하는..'을 "나의 텍스트에서 뺀다" 라고 선언하지만 않았다면, "그 소설을 절판하겠다" 라면서 좌뇌들에게 백기만 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한국에서 몇 안되는 진정한 이야기꾼이기에 충분한 것이다. 결국, 이념이 쓸만한 글쟁이 한사람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
예술적 지성이 이론의 정립까진 말하지 않기에, 근.현대 문학사에서 보인 우리의 문학은 내적 굴레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과거지향적 문학으로만 방치되어 왔던 것이다. 동양철학의 일부가 '회귀'로 보여지는 것은 너무 작아지고 너무 낮은 곳으로만 임하려는 겸양의 미덕 때문은 아닌지? 이러한 미덕이란 모든 것들과 담을 쌓거나 수용을 배척하면 쉽게 이뤄지는 모순도 안고 있음이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말이다.
우리의 자아는 끊임없이 유동한다. 몽테뉴가 변화를 거부하는 매너리스트를 무관찰자로 규정해 버린 이유도, 이성으로서의 지조와 생물학적인 변화무쌍함의 조화를 혼돈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의 철학이 자연에 대한 원자적인 분석과 현상학적 적절한 안배의 부족으로 나타 나는 것은, 만주라는 영토를 잃어버린 후.. 일제의 약탈과 한반도 파괴의 황량함이 더하여, 종국엔 민족적 이상과 동경까지 말살된 것이 아닌가? 보여 진다.
예술적 포부란? 끝없는 상상의 나래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광활한 대지위에서 대자연이 내뿜는 일상의 화화적인 음악도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노벨문학상을 바라보는 국가 이력인데..글쟁이 이문열이가 정치판에 한발을 담궈 놓고 있음이다. 우리들 의식의 패러다임까지 걱정해야 될 판국이다.
권력지향적으로 변질된 학문은 김용옥이라는 게걸스러운 입담꾼이 나오게하고, 오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강준만이라는 지성인을 나오게 한다. 그들이, 고작해야 기성정치인의 하수인 역할이나 할 형편을 알기에..필자는 한없는 서글픔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조정래류는 또 무슨 소리로 글쟁이들을 욕먹이고 다니는 건가? 정말 시인들은 이 사회에서 죽은겐가?
2005-06-02 오후 2:08:32 양기용 기자 : 취재국장/편집2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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